머니투데이

속보
통합검색

9살 봄이의 '온라인 개학'…선생님이 돼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머니투데이
  • 남형도 기자
  • 카카오톡 공유하기
  • 카카오톡 나에게 전송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 카카오스토리
  • 텔레그램
  • 문자
  • VIEW 6,059
  • 2020.04.25 06:10
  • 글자크기조절
  • 댓글···

학교 못 가는 다섯 아이, 홀로 돌보는 외할머니…봄이의 꿈은 '미술 선생님', 필요한 건 무엇일까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9살 봄이가 TV를 보며,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 양반다리를 하고도, 꿈쩍 않고 긴 수업을 다 들었다./사진=다리 저린 남형도 기자
9살 봄이가 TV를 보며,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 양반다리를 하고도, 꿈쩍 않고 긴 수업을 다 들었다./사진=다리 저린 남형도 기자
9살 봄이의 '온라인 개학'…선생님이 돼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선생님, 이거 쓰는 거예요?"


봄이(가명, 9살, 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끄러미 날 봤다. TV에선 한창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봄이의 온라인 개학 첫날. 이제 2학년이 됐단다. 자그마한 책상 위엔 국어 교과서가 놓였고, 난 아이 오른쪽에 앉았다. 봄이가 헷갈리는 사이, 화면 속 친절한 선생님은, 이미 휙휙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맘이 급해졌다. 난 재빨리 뭘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기자: "수업 주제가 봄이에요. 봄을 생각하면, 뭐가 떠오를지 얘기하는 거예요."
봄이: "아아."
기자: "봄이는, 봄을 떠올리면 뭐가 생각나요?"
봄이: "핑크색 꽃이요. 아, 노란 꽃도요. 빨간 꽃도 좋아요."
기자: "맞아요. 또 뭐가 생각나요?"
봄이: "미세먼지!"
기자: (땀 삐질) "아, 그렇죠. 하하."

허리도, 무릎도 많이 아파 누워있는 외할머니 박모씨. 그에게 일상은 많이 무거웠으리라./사진=남형도 기자
허리도, 무릎도 많이 아파 누워있는 외할머니 박모씨. 그에게 일상은 많이 무거웠으리라./사진=남형도 기자

그날 하루, 봄이의 선생님이 돼봤다. 코로나19로 집에서 온라인 개학을 한 아이 수업을 도와주는. 대학교 때 과외 하다 잘린 경험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봄이네 집에 간 이유가 있었다.

봄이는 외할머니 박모씨(65)와 산다고 했다. 첫째는 언니 여름이(가명, 19), 둘째는 오빠 가을이(가명, 17), 셋째는 언니 겨울이(가명, 16), 넷째는 오빠 계절이(가명, 12). 그리고 지체 장애가 있는 외삼촌까지. 모두 일곱 식구였다.

봄이 엄마와 아빠는 심리, 정서적으로 어려움이 있단다. 그래서 가출이 잦았다. 이를 보다 못한 외할머니 박씨가 아이들을 키우게 됐다. 그는 가사도우미, 활동보조인으로 일하며 다섯 아이와 아들까지 키웠다. 그 몸이 무쇠라도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결국 건강이 나빠져 일도 그만뒀다. 기초생활수급비와 양육보조금, 장애수당 등 지원을 받아 살고 있다.

요즘 학교를 못가는 다섯 아이, 그리고 이를 돌보는 외할머니. 얼핏 짐작해도 버거울듯한 이들의 공부는 어떻게 잘 되고 있을까. 20일, 초등학교 1~3학년이 온라인으로 개학하던 날,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기가정위탁지원센터의 정다애 과장과 함께 이들을 찾아가 봤다.



유치원을 늦게 갔다는 아이


봄이의 셀카. 볼에 붙은 하트 이모티콘이 귀엽다./사진=이래서 딸바보가 되나 이해하게 된, 애 없는 남기자
봄이의 셀카. 볼에 붙은 하트 이모티콘이 귀엽다./사진=이래서 딸바보가 되나 이해하게 된, 애 없는 남기자

단발머리에 공주 머리핀이 잘 어울리는 아이, 그게 봄이 첫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하고 허리를 꾸벅 숙이기에, 같이 "안녕하세요"하고 몸을 푹 숙였다. 아이는 쑥스러운지 눈을 잘 안 마주쳤다. 조금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외할머니 박씨는 "봄아, 넌 왜 예쁜 얼굴을 그렇게 하고 있어"라고 얘기하곤 했다. 퉁명스러운 말 속엔, 마음이 배어 있었다. 그러면 봄이는 "네"하고 대답했다.

봄이 이야기를 들었다. 6살 때 외할머니가 키우게 됐다. 유치원도 못 가고 있다가, 뒤늦게 부랴부랴 갔다. 그래서 배움이 늦었다. 유치원에서 '봄이'라고 이름을 쓰는 데에만, 6개월이 걸렸단다.

글씨를 잘 모르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엔 엄마와 할머니가 왔다. 봄이는 "그때 좋았어요"하고 모처럼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유치원에서의 늦은 배움이, 1학년 때도 이어졌다. 그리 1년이 지났어도 한글을 읽고 쓰는 게 아직 서툰 편이다. 박씨는 "아무래도 내가 배움이 적어서, 물어봐도 많이 못 가르쳐줘. 그게 속상하지"라고 했다.

자신이 못 배웠고, 못 가르쳐서 자식들도 고생하는 것 같다며. 그 말에 속이 쓰렸다. 학교 수업의 부재가, 부단히 고생하며 산 이의 자책으로 이어진다는 게. 거실에 자그마한 책상을 놓은 봄이는 그저 묵묵히 앉아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1학년 수업이 방송에서 나오자, 박씨는 "1학년 것도 한 번 더 들어"하고 말했다. 그렇게라도 배움을 메우려는 듯.



아이 다섯 명, 컴퓨터 두 대


핸드폰으로 수업 듣는, 초등학교 5학년 계절이./사진=남형도 기자
핸드폰으로 수업 듣는, 초등학교 5학년 계절이./사진=남형도 기자

이날 오전 9시. 거실과 방은 이미 제각기 온라인 수업을 듣는 아이들로 분주했다.

아이 다섯 명에 컴퓨터는 2대. 그마저도 1대는 인터넷 연결이 안 돼 쓸모가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여름이가 컴퓨터를 쓰고, 다른 세 아이는 스마트폰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계절이가 영어 수업을 듣다가, "화면이 작아서 불편하긴 해요"라고 넌지시 말했다. 아이는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자주 얼굴을 들이밀었다. 옆에서 들어보니, 소리도 시원스레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도 없었다.

학교에서 노트북을 지원해준다지만, 외할머니가 잘 몰라 놓쳤다. 다 문자로 오는데, 아이들이 많아 제때 챙기지 못한 게 많다. 긴급돌봄도 그래서 못 받았단다. 박씨는 "어디 들어가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봄이는 학교 가는 거 좋아하는데, 내가 놓쳤다"고 재차 중얼거렸다.

다행히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기가정위탁지원센터서 노트북 1대를 지원해주기로 했다. 신청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지급되진 않았다. 정 과장은 "아무래도 노트북이 다 지원되긴 어렵고, 중고생부터 먼저 하고, 나중에 또 생기면 아이들을 줘야할 것 같다"고 했다. 박씨는 "한 대 놓고 또 싸울까봐 걱정이야"라고 혼잣말을 했다.



1교시 : 국어 수업


봄이의 1교시, 국어수업. TV로 진행돼 다행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봄이의 1교시, 국어수업. TV로 진행돼 다행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오전 9시30분, 봄이의 초등학교 2학년 첫 수업이 시작됐다. 1교시는 국어였다.

봄이는 EBS TV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는 자그마한 상을 놓고, 그 위에 새 교과서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TV를 응시했다. 난 그 오른쪽에 앉았다. 박씨는 "봄아, 모르면 선생님(기자)한테 물어봐"라며 "죄송해요, 기자님"이라고 했다.

수업 주제는 시를 읽는 거였다. TV 속 선생님은 낭랑한 목소리로 윤동주 시인의 '봄'을 읽기 시작했다. 봄이는 이를 멍하니 봤고, 나도 함께 멍하니 봤다. 그러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같이 따라서 읽어야 하는데.

기자: "봄아, 우리 저 시 같이 읽어볼까요?"
봄이: "네."
기자: "우리 애기는."
봄이: "우리 애기는."
기자: "발치에서."
봄이: "발치에서."
기자: "코올코올."
봄이: "코올코올."


봄이와 교과서를 읽으며 집중하다, TV 화면을 보니 어디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쏭알쏭알 싸리잎에 은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교과서를 뒤적이는데, 어딘지 몰라 한참 헤맸다. 봄이에게 "교과서에 없는 내용인가 봐요"하고 둘러댔다(미안).

막막한 시간이 끝나고, 교과서에 있는 시로 다시 돌아왔다. '다툰 날(오은영 시인)'이란 시였다. 시를 함께 읽고, 봄이에게 친구와 다툰 적이 있냐고 물으니 없단다. 혹시 다투면 어떻게 사과할 것 같냐니까 봄이는 이렇게 말했다.

봄이: "친구야, 미안해. 내가 잘 몰르구 그래서 글래. 같이 놀자!"
기자: "그래요. 그렇게 화해하는 거예요."
봄이: "맞아요?"
기자: "네, 맞아요."




2교시 : 수학 수업


선생님, 순간 포착을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사진=송구스런 남형도 기자
선생님, 순간 포착을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사진=송구스런 남형도 기자

그리고 쉬는 시간 30분. 1교시를 겨우 마친 뒤 목이 꽤 탔다. 시를 낭송한 건 백만년 만이라 그랬는지. 착한 봄이가 물 한 잔을 가져다줬다. 국어 수업 어땠냐고 물으니 "한 발짝, 두 발짝, 오는 게 재밌었어요!"라고 신나서 말했다. 수업을 듣는 동안 꽤 친해졌다.

2교시는 수학 수업이었다. 오늘 수업은 '세 자릿수'라고 했다.

아예 동영상을 못 쫓아갈 것 같아, 수업 시작 10분 전에 예습하기로 했다. 봄이는 몸을 들썩이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 내게 집중해줬다. 어찌나 고맙던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봄이가 쉽게 이해할까./사진=난감한 남기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봄이가 쉽게 이해할까./사진=난감한 남기자

기자: "봄아, 세 자릿수 알아요?"
봄이: "숫자가 셋?"
기자: "음, 예를 들면 3은 몇 자릿수일까요?"
봄이: "세 개?"
기자: "음(진땀), 한 번 써볼까요? 3은 한 자릿수. 왜냐면 숫자가 한 개니까요."
봄이: "아아!"
기자: "그럼 10은 몇 자릿수일까요?"
봄이: "두 자릿수!"
기자: "오, 맞았어요. 잘했어!"


그리고 세 자릿수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했다. 90보다 10이 더 큰 수라는 것, 그걸 100(백)이라 부른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숫자는 101(백일), 102(백이),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 그렇게 199(백구십구)까지 가면, 마침내 200(이백)이 된다는 것도.

서툰 내 설명에도, 봄이는 몹시 집중하며 귀 기울였다. "이거 맞아요?", "이거는요?"하고 되묻곤 했다. 기특했다. 그래서 자주, 잘했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쉬는 시간: 노래 맞추기 놀이


온라인 수업 후 뻗어버린 봄이. 봄이야, 괜찮아?/사진=남형도 기자
온라인 수업 후 뻗어버린 봄이. 봄이야, 괜찮아?/사진=남형도 기자

2교시도 끝나고, 고생한 아이를 위해(또 나를 위해) 쉬는 시간을 가졌다.

TV에서 노래가 나왔다. 갑자기 봄이가 노래를 불렀다. "사랑을 했따, 우리가 만나~ 했다~." 봄이에게 노래를 잘한다고 했더니, "여기까지만 알아요"하며 쑥스러워했다. 이건 두 번째 좋아하는 노래란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OST란다.

그리고 서로 좋아하는 노래 맞추기를 시작했다. 글자 수를 알려주고, 첫 글자를 알려주고, 상대방이 맞추는 거였다(너무 어려웠다).

봄이: "네 글자예요. 첫 글자는 쏘!"
기자: "쏘? 소? 가요예요?"
봄이: "아니요. 한 글자 더 알려줄게요. 소피."
기자: "소피? 뭐지, 만화예요?"
봄이: "네, 애기들이 보는 거예요!(너도 애긴데). 에이, 한 글자 더 알려줄게요. 소피루."
기자: "소피누나?"
봄이: "아뇨, 크흡. 소피 루비요."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지만, "아, 그거!"하고 맞장구를 쳐줬다. 그 다음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봄이가 맞출 차례. 문제를 내보라고 하기에, 세 글자라고 했다. 봄이가 첫 글자만 알려달라고 했다.

기자: "음, 첫 글자는 뽀?"
봄이: "뽀로로?"
기자: "정답!"
봄이: "어? 그거 애기들이 보는 건데."
기자: "(진땀)아, 선생님은 좀 오래 봐요. 하하."



3교시 : 봄이의 옛 기억


어릴적 진달래 앞에서 찍은, 봄이 사진./사진=남형도 기자
어릴적 진달래 앞에서 찍은, 봄이 사진./사진=남형도 기자

'봄 교과서'라는 게 있는 줄 몰랐는데, EBS TV 편성표를 아무리 봐도 수업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서 나눠준 프린트를 보니, '학습 꾸러미'란 별도 유인물을 보고 수업을 하라고 돼 있었다.

봄이가 옛날 사진을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이라 했다.

기자: "봄아, 몇 살 때까지 기억나요?"
봄이: "음, 한 살 때는 기억 안 나고. 두 살 때도."
기자: "봄이 어렸을 때 사진 있어요?"
봄이: "할머니 핸드폰에 있어요."


봄이가 외할머니 핸드폰을 가져왔다. 거기엔 진달래꽃과 함께 예쁘게 사진을 찍은, 다섯 살 봄이가 있었다. 꽃 앞에서, 뺨에 오른손을 살포시 올린 채 수줍게 웃고 있었다. 봄이에게 이때 기억나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단다.

빈칸에, 어린 시절 모습을 그려보라 했더니 겨울이 언니와 노는 모습을 그렸다. 둘이 꽤 친한지, 겨울이 언니가 엽서에 봄이를 그려준 것도 보여줬다. 엽서엔 '봄이 건들지마'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아래엔 '작가: 겨울이 언니', '받는 사람: 봄이 공듀'라고 적어 놓았다. 따뜻했다.

봄이는 언니와 노는 모습도 그리고, 셀카를 찍는 자기 모습도 그렸다. 교재를 보니, 그걸 보며, 얘길 나눠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봄이에게 물었다.

기자: "봄아, 이 그림 속 봄이 표정이 어떤 것 같아요?"
봄이: "예뻐요, 앗 아니…"
기자: "하하, 맞아요. 또 어때요?"
봄이: "이건(또 본인 사진) 귀여워요."
기자: "그, 그래요. 하하. 맞아요."

자기가 말해놓고도 쑥스러운지, 슬며시 웃던 봄이. 아이 표정이, 아침보다 꽤 밝아진 것 같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었다.



4교시 : 봄이의 꿈 이야기


그림을 잘 그리는 봄이, 그게 꿈이란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림을 잘 그리는 봄이, 그게 꿈이란다./사진=남형도 기자

마지막 수업을 하기 전, 귀한 짜장면을 먹었다. 아침부터 수업하느라 배고팠을 거라며, 박씨가 전화기를 들었다. 내가 사겠다 했으나, 그는 한사코 날 만류했다. 몇몇 아이들은 이미, 배고프다며 빵에 잼을 발라 먹고, 햄을 스스로 부쳐 먹은 뒤였다. 그러니 나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시킨단 걸 잘 알고 있었다.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봄이와 수업을 이어갔다. '나의 꿈 찾기'였다. 초등학교 2학년에게 꿈이란 어떤 느낌일까 싶어, 차근차근 설명했다. 나중에 봄이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크면, 그러니까 선생님만큼 커지면, 뭘 하고 싶은지 묻는 거라고.

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미술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상상해보면 어떠냐고 물으니 봄이는 "잘 가르칠 것 같다"며 자신 있게 답했다. 그 모습이 참 좋았다. 꿈이란, 그리 말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였다.

그리고 봄이에게, 미술 선생님이 되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고 물었다.

봄이: "우리 가족을 그리고 싶어요."
기자: "가족을 어떻게 그리고 싶어요?"
봄이: "음, 여자들은 좀 예쁘게, 남자들은 좀 멋있게!"
기자: "아하하하."


그러더니 외할머니 얘길 빼놓지 않았다.

봄이: "할머니는 귀여웁게."
외할머니: "야, 그만해."
봄이: "이히."
외할머니: "할머니는 뭐가 귀엽게야. 돼지 같이 못 생겼는데."


그러자 봄이가, 그날 하루 중, 가장 목소릴 높이는 게 아닌가.

봄이: "아니에요!"
외할머니: "아니야?"
봄이: "네!"
외할머니: "아니야? 고마워요."
봄이: "네!"



아이의 옆자리


"안녕히 가세요." 봄이의 배꼽 인사./사진=뿌듯한 남형도 기자
"안녕히 가세요." 봄이의 배꼽 인사./사진=뿌듯한 남형도 기자


봄이와의 온라인 개학 첫날이 그리 끝났다. 아이는 90도로 허릴 숙여,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리 함께해보니, 봄이 옆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아이는 어렸고, 함께할 누군가 옆에 필요했다.

동영상으로 전달하는 수업이라, 학생들과 호흡을 맞출 수 없었다. 잠깐 헤매는 사이, 진도는 이만큼 또 나아가 있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뒤에도, 봄이와 남은 공부를 더 해야 했다. 외할머니 홀로, 이 많은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봄이 눈높이에서 전달하는 게. 내 입장에선 쉽고 당연한 것도, 봄이는 처음 배우는 것이니. 이를 차근차근 잘 설명해줘야 했다. 그게 만만찮았다.

아이를 둘 키우는 정 과장은 "준비물도 적절히 준비하고 챙겨야 하는데, 어르신과 함께하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그런 게 힘들 수 있다"고 했다.
집안에 한 대 있는 컴퓨터로, 올해 고3이 된 여름이가 공부하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집안에 한 대 있는 컴퓨터로, 올해 고3이 된 여름이가 공부하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러나 현실이 그랬다. 고3인 여름이에게도, 고1인 가을이에게도, 중3인 겨울이에게도, 초등학교 5학년인 계절이에게도, 외할머니 홀로 감당하기엔. 그러니 봄이는 배움에 더 목이 말랐는지도 모르겠다. 그 오랜 시간을 앉아 있고도, 불평하거나 몸을 들썩이지 않은 걸 보니. 박씨는 이미 지쳐 있었다. 지겹다, 힘들다는 말을 많이 했다. 허릴 부여잡고 잘 못 걸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눈을 차마 떼지 못했다. 그 맘이 느껴졌다.

꿈 이야기를 하며 봄이는 가족 얘길 많이 했다. 미술 선생님이 되면, 가족 그림을 그려보라고 가르칠 거란다. 어떤 모습이냐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어디 놀러 간 모습을 그려보라 할 거예요. 벚꽃도 볼 수 있고요. 엄마랑 같이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아빠랑 같이 찍을 수도 있고요. 마지막엔 색칠할 거예요. 옷은 핑크색과 노란색, 운동화는 빨간색. 그러면 예뻐져요."
가난의 되물림을 끊기 위해 필요한 건, 한끼 식량이 아니라 배움이라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사진은 이태석 신부의 뜻에 따라, 한국에 와서 의대를 졸업한 토마스./사진=뉴스1
가난의 되물림을 끊기 위해 필요한 건, 한끼 식량이 아니라 배움이라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사진은 이태석 신부의 뜻에 따라, 한국에 와서 의대를 졸업한 토마스./사진=뉴스1

에필로그(epilogue). 봄이와 헤어지고 오던 길, 문득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가장 가난하고 외면받는 나라, 아프리카 남수단. 그곳에서 '슈바이처'라 불리며 일평생 봉사했던 고(故) 이태석 신부(1962~2010)가 그곳에 세운 건 '학교'였다. 단지 한 끼를 해결하게 하거나, 한 명을 치료하는 것만 집중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공부하도록 했다. 이 신부는 잘 알고 있었다. 가난을 끊고 자립하게 하려면, 배워야 한단 것을.

당시 이 신부를 따르던 남수단 꼬마가 있었다. 이름은 존 마옌 루벤. 아이는 그의 뜻을 따라 의술을 배웠고, 서른셋이 되던 올해 마침내 의사가 됐다. 존은 "신부님, 그 약속 기어이 지켜냈어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남수단에 돌아가 의대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제2의 이태석 신부가 되고 싶다고, 후배 의사를 양성하겠다고.

그러니, 봄이에게 정말 필요한 건 뭐였을까. 생계를 위한 더 많은 지원금일까, 아니면 온라인 수업을 듣기 위한 노트북 여러 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예쁜 옷 한 벌일까. 우리는, 그저 우연히, 더 나은 환경에서 태어났거나 그러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배움의 기회조차 차별해도 괜찮은 걸까.

다음은 봄이와 나눈 마지막 대화.
또박또박 써내려간, 봄이의 꿈.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어른이라 불리는 우린, 무얼 고민해야 할까./사진=남형도 기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봄이의 꿈.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 어른이라 불리는 우린, 무얼 고민해야 할까./사진=남형도 기자
봄이: "(노트에 또박또박 쓰며 혼잣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그림 공부를, 할 것입니다."
기자: "그게 봄이 꿈이에요."
봄이: "네, 선생님."
기자: "좋죠?"
봄이: "네!"



  • 남형도
    남형도 human@mt.co.kr

    쓰레기를 치우는 아주머니께서 쓰레기통에 앉아 쉬시는 걸 보고 기자가 됐습니다. 시선에서 소외된 곳을 크게 떠들어 작은 변화라도 만들겠다면서요.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마음 간직하려 노력합니다. 좋은 제보 언제든 기다립니다.

    쉬운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베스트클릭

오늘의 꿀팁

  • 날씨
  • 건강쏙쏙

많이 본 뉴스

머니투데이 페이스북 퀴즈 이벤트
머니투데이 기업지원센터

포토 / 영상

머니투데이 SERV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