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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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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3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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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정진혁 시인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시인의 집]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여기 “삶은 모르고 예술은 조금 아는 척하는”(‘어둔 계열’) 한 사내가 있다. 평지보다 비탈에 더 익숙한 사내는 기우뚱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늘 무언가를 잡고, 누군가를 잡아준다.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한 정진혁(1960~ ) 시인은 세 번째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에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항상 떠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이하 ‘시인의 말’) 증명한다.

“확신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말수는 적어졌고”(‘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떠나온 옛집”(이하 ‘미조항’)의 기억 속을 오래 떠돈다. 봄에 “미조항에 가서” 입과 눈과 길 잃기를 바란다는 것은 힘든 현실을 잠시 잊고 “아름다운 생”에 접속하고 싶은 바람의 다른 표현이다. 시인은 질문한다. 어느 생부터 잘못된 것일까. “온 생을 밀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미륵(彌勒)은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 부처다. ‘미조(彌助)’는 미륵이 돕는다는 뜻. “미조(彌助)가 피었다”는 현재와 미래의 함의로, 눈물이 멈췄음을 의미한다. 전생이라 했지만 결국은 과거의 기억이고, 어느 봄날의 좋은 추억으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여행은 남해 미조항에서 여수로 이어진다. “당신을 당겨서 만든 감정이 아득할 때”(이하 ‘여수에서’) 떠난 여수에서 시인은 오동도 동백과 향일암 일출을 본다. 하지만 마음은 “혼자 두고” 온 당신에게 머문다. “아직이 아니고 다음이 아닐 때”라고 했으니 당신과의 갈등이 심한가 보다. 시인은 “너무나 생생한 붉음의 윤곽 안에서” “일곱 동백”만큼 운다, 부침이 없는 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눈물은 회복의 힘을 지니고 있다.

산기슭에서 만났다
오후가 느리게 떨어지는 동안
저녁이 모이고 모였다
너도바람꽃 불러 보다가
고 이쁜 이름을 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뿌리째 너를 떠냈다
산길을 내려오다 생각하니
네가 있던 자리에
뭔가 두고 왔다

너도바람꽃은
아직 바람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어둠 속에 저 혼자 꽂혀 있을 손길을 생각했다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히 꽂아 두고 온 것들

빗소리가 비스듬히 내리는 밤이었다

- ‘너도바람꽃’ 전문


여는 시 ‘너도바람꽃’은 시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바람꽃도 있고, 나도바람꽃이 있지만, 굳이 너도바람꽃이다. 꽃말은 사랑의 괴로움, 사랑의 비밀이다. 이른 봄에 피는 너도바람꽃을 “산기슭에서” 만난다. 짧은 해가 금방 진다. “고 이쁜” 너도바람꽃을 가까이 두고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뿌리째” 떠낸다.

“산길을 내려오다 생각”한다. 나무도, 꽃도, 돌도, 바람도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그곳을 벗어나면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이름이 말해주듯, 그곳에 부는 바람이 있어야 진정 너도바람꽃이다. 아직은 완성형이 아니다. 날이 어두워 너도바람꽃이 원래 있던 곳까지 가지 못하고 길가에 임시로 “비스듬히 꽂아” 둔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 지금까지 살면서 너도바람꽃처럼 누군가의 생을 뿌리째 뽑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생각하고, 반성한다. 너도바람꽃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도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고향이나 사랑하는 사람 곁일 수도 있겠지만, 그저 자신에게 맞는 ‘제자리’가 맞다. “어둠 속에 저 혼자 꽂혀 있을 손길”의 대상은 너도바람꽃이지만, 결국 외롭고 쓸쓸한 자아를 상징한다. ‘비스듬히’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한 심리상태를 드러내고, 이른 봄밤에 내리는 비는 득보다 실이 많음을 암시한다.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
내 눈과 내 낱말들이 누군가의 한 잎 속에서 산다는 것

당신의 한 잎은 온통 숨결이어서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여서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들 사이여서

날마다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
분홍을 입어요, 분홍을 먹어요, 분홍을 춤춰요
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청평이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 같은 지명을
여기선 다들 분홍이라 불러요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도 나는 분홍이라 불러요

분홍에서만 나를 느낄 수 있으니
뒤집혀도 분홍
분홍과 분홍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둥긂이 되었지요

있잖아요
분홍 한 장을 넘기며 가장 낮은 곳 가장 높은 곳에서
울어 본 적 있나요?
한 잎의 분홍 앞에서 웃어 본 적 있나요

오늘은 분홍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봤어요
거기까지 가 보니 당신이 진짜 분홍이었어요
오뉴월 복중 같은 사내 하나가 그 속으로 들어가서는
영 나오지 않았어요

- ‘있잖아요, 분홍’ 전문


이번 시집에는 꽃이 자주 등장한다. 동백꽃·벚꽃·백일홍·복숭아꽃·능소화·맨드라미·개망초꽃·찔레꽃·목련꽃·노랑매미꽃·큰달맞이꽃·국화·분꽃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들은 대부분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하양이나 노랑, 빨강과 같이 색깔의 이미지로 표출된다. 특히 꽃과 열매의 색깔인 ‘분홍’은 다양한 의미로 시에 존재한다.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일이/ 분홍의 다른 이름”(‘꽃을 그냥 보냈다’)이나 “고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분홍 보자기에 뭔가를 싸서 몰래 집을 나간다”(‘청주 사직동’), “엄마의 몸에서/ 비린내 대신 분홍의 냄새가 났다”(‘도화동사거리에서’)에서 알 수 있듯, 분홍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면서 향수다. 하지만 분홍의 뒤편에는 “희미한 아버지”(이하 ‘역설의 유전자’)가 있다. “봉숭아 물든 손톱처럼/ 누가 욕을 해도 희미했고 누가 돈을 떼먹어도 희미한” 슬픈 아버지.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는 나.

어렸을 때나 “실업이 자꾸 나를 밀”(이하 ‘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어 내 몸에 “모난 말들이 터를 잡았”을 땐 잘 모르겠지만, “이제 좀 알 것 같”다. “설렘으로 들떠 있”(이하 ‘색깔 없는 미술관’)는 노랑이나 “슬픔으로 지워지는” 빨강, 자주 가까이 두고 만지작거리는 하양(‘각을 보았다’)에 비해 분홍은 “가장 낮은 곳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울리는 색깔이라는 것을.

깊은 산 계곡에서 굴러떨어진 모난 돌은 시내와 강을 거치면서 점차 둥글어진다. 어느덧 환갑이 이른 시인은 깨닫는다. 과일은 모난 데가 없으며,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이라는 걸, 내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것을. 시인은 느낀다. 당신의 숨결과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 그리고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을.

“청평이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로 떠돈 세월과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이 다 분홍이라는, 각진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시간과 몸짓이었음을 비로소 이해한다. 마음은 이해만큼 둥글어진다. “분홍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본 시인은 “당신이 진짜 분홍이었”다고 말한다. 당신은 “오뉴월 복중 같은 사내”, 즉 아버지다. 하지만 아버지는 곁에 없다.

하여 이번 시집은 ‘그리움의 원형’을 찾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뭉클하면서도 서러운 그것은”(이하 ‘우리 문장은 외따로 존재할 수 없다’) 언제나 “안김과 안음이 뒤섞”이는 순간에 조용히 왔다 간다. 아버지를 닮은 중년의 사내 몸이 기우뚱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는다. 분홍으로 물들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정진혁 지음. 파란 펴냄. 144쪽/1만원.


[시인의 집]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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