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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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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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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고민 들어주는 시각장애인 '마음 보듬사'…대학생들이 아이디어, "더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고요하고 짙은 어둠뿐이었다. 작은 빛마저 자취를 감춰 칠흑 같았다. 눈을 깜빡거려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지막이 두드리는 심장 박동, 그리고 손끝에 닿은 쿠션의 보드라운 느낌만 남았다. 귓가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짙푸른 청량함이었다. 하루 내 힘겨웠던 눈꺼풀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잘 살아내겠다고 잔뜩 힘줬던 어깨도 스르르 풀렸다. 그 누구도 날 못 보고, 그 무엇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이 어둠이 어쩐지 편했다. 부지런히 내느라 지치고 고단했던, 내 숨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어둠은 괜찮나요? 혹시 불편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네, 편안하고 좋네요."
"그래요, 나무님. 어떤 고민이 있을까요? 편안히 얘기해보세요."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그 너머엔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날 '나무'라 불렀고, 난 그를 '바다'라 불렀다. 넓은 세상서 깊은 사람의 마음을 품기에 바다라고 했다. 그 외엔 서로 아무것도 모르니 좋았다. 봄날 햇살이 곱게 드리운 제주 유채꽃 같달까. 그 정도 온도와 빛깔을 가진 안온한 목소리였다. 꽤 복잡했던 하루가 스쳐 지나갔다. 마음은 몇 번 허물어졌고, 머리는 주저앉고 싶은 몸을 일으켰었다. 으레 그렇듯 묵묵히 버티니 어스름한 저녁이 됐다. 오늘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졌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안에선 다 받아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참 힘들었던, 어느 하루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컴컴한 어둠 속에서 속내를 이야기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블라인드 마음보듬'이라 불렀다. 시간은 50분. 들어주는 이는 '마음보듬사'라 불렀다. 마음을 보듬어준다니 따스했다. 심리상담까진 무겁지만, 그저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면 제격이랄까. 기꺼이 내 편에서 마음을 알아주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는. 그러니 이곳은 마음이 아프건 그렇지 않건, 누구나 다가가기 쉽게 활짝 열어놓은 장소였다.

실은 그날은 공교롭게 좀 힘든 날이었다. 6월 2일 화요일이었다. '월경은 월경이다'란 4부작 기획의 마지막 기사가 아침에 나갔었다. 여전히 터부시되는 월경에 대해 필요한 얘기들을 써왔었다. 4편은 여성 청소년들이 필요할 때, 휴지처럼 생리대를 썼으면 하는 맘을 담았다. 아침 6시30분에 댓글을 봤다. 몇몇은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졌고, 몇몇은 생각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기대가 실망이 돼 무너졌다. 다 내 불찰이라 받아들이고, 기사 제목을 두 번 수정했다.

아직 오전이었건만, 기분이 축 처졌다. 왜 그런지, 어디서부터 뒤엉켰는지도 잘 몰랐다. 어깨에 멘, 늘 같은 무게의 가방이 무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출근길에 애써 신나는 노랠 들었다. 영 기운이 나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멍을 때리다, 내린 뒤엔 뒤따라오며 밀려드는 직장인들을 따라 광화문역 계단을 올랐다. 어영부영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엔 그마저도 맘이 편치않아 취재하러 나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건만, 쉬는 걸 못 견디는 내가 그 꼴을 못 보고 또 채찍질했다.
버스 손잡이 하나에 축 늘어진 몸을 실을만큼, 힘이나지 않았던 퇴근길./사진=남형도 기자 왼손
버스 손잡이 하나에 축 늘어진 몸을 실을만큼, 힘이나지 않았던 퇴근길./사진=남형도 기자 왼손

취재를 다녀오고, 기사 마감을 하니 만사가 다 귀찮았다. 몸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저녁 6시, 퇴근하고 버스를 탔다. 블라인드 마음보듬 서비스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하필 버스엔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손잡이 하나를 두 손으로 쥐고, 축 늘어진 몸을 맡겼다. 뒤에서, 옆에서,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진 사람들이 날 밀어댔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거실 바닥에 대걸레처럼 널브러져 쉬고 싶었다.



"오늘 참 힘들었어요" 쉴새 없이 쏟아낸 말들



이 안경을 쓰고, 고민을 털어놓는 블라인드 방으로 이동한다. 앞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내 무릎을 보고 있다. 신기방기한 안경./사진=유연수 봄 그늘 매니저
이 안경을 쓰고, 고민을 털어놓는 블라인드 방으로 이동한다. 앞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내 무릎을 보고 있다. 신기방기한 안경./사진=유연수 봄 그늘 매니저

어렵사리 도착했다. 안내 직원이 안경 하나를 건넸다. 그걸 쓰니 바닥만 보였다. 이제 컴컴한 방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직원의 팔을 잡고, 따라 들어가 앉았다. 쿠션이 있는 아늑한 의자였다. 안경을 벗자, 새까만 어둠만 남아 있었다. 그게 커다랗고 포근한 침대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는 편안함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그리고 두서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무(나) : 제가 오늘 기사 제목에 '갑자기 터진 생리'라고 썼거든요. '터지다'가 폭탄에만 쓰는 게 아니에요. '코피 터졌다' 아시죠. 갑자기 뭔가 쏟아질 때도 그 표현을 써요. 안 좋은 표현이 아니에요. 생리가 그렇잖아요. 그런데 댓글서 누군가 그 표현이 불편하다고 하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하다가, '시작됐다'라고 바꿨어요. 그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근데 마음은 속상한 거예요. 그게 다가 아닌데, 더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는데, 기사를 다 읽긴 한 걸까 싶었고요.

바다: 나무님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되네요. 그럼요. 충분히 그러셨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몰라줬을까요. 속상하셨겠어요.

나무: 네, 조금은요. 학생들이 얼마나 당황하겠어요. 예민한 시기잖아요. 생리는 예고 없이 시작되지, 생리대는 없지, 친구들에게 빌리러 다니기도 쑥스럽고요. 그래서 화장실 휴지처럼 편하게 구했으면 싶었어요. 그런 맘을 꾹꾹 담았어요. 조금이나마 알아줬으면 싶었어요. 진심은 통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저도 알아요, 다 제 생각 같을 순 없으니까. 그런데 짐작해줬으면 했어요. 같은 마음이었으면 했고요.
어둠 속에서 혹시나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땐, 버튼을 누르면 바깥에 있는 매니저들에게 호출이 간다./사진=남형도 기자
어둠 속에서 혹시나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땐, 버튼을 누르면 바깥에 있는 매니저들에게 호출이 간다./사진=남형도 기자

바다: 그렇지요, 아무렴요. 그래서 마음이 어땠나요?

나무: 처음엔 '다음엔 이런 부분 더 신경 써야지' 했어요. 섬세하게 전달해야겠다 싶어서요. 근데 마음이 나아지지 않는 거예요. 괜히 막 삐딱해지더라고요. 내가 고작 이런 얘기 들으려고 이렇게 발품을 팔았나, 하루 내내 머리 쥐어뜯고 빈속에 커피 들이부었나, 회의감이 들고요. 그냥 대충 쓰면 되는데 왜 어려운 주제 잡고,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데 싶었고요. 그런 생각을 하니 계속 지치는 거예요. 마음이 뒤집어지더라고요.

바다: 그랬을 것 같아요, 나무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렴요.



바다는 내 편이라, 마음속에 묵은 말들까지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차분히 꺼낸 말들은 점차 늘어났고, 대화는 점점 고조됐다. 바다 마음보듬사는 묵묵히 듣고, 맞장구를 쳐줬다. "음, 음, 아, 그렇죠, 그럼요, 맞아요, 그랬군요, 이해가 돼요, 아무렴요, 정말 그래요" 같은 말들이 어둠 속에서 햇볕처럼 들려왔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도, 내 얘길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마음속에 묵혀 있었던, 더 많은 이야길 쏟아내게 됐다. 바다는 내 편이고, 보이는 건 없었고, 들리는 건 지친 나를 곱게 지지해주는, 그의 목소리뿐이라서.

바다: 나무님이 기사를 쓸 때, 마음을 많이 써서 그럴 거예요. 기대처럼 잘 안 되고 그렇잖아요. 그게 내 맘처럼 안 된다는 걸 알아도 그렇잖아요. 그런 게 힘이 들었을 것 같아요.

나무: 정말 그랬어요. 힘들었어요. 생각해보니 좌절감이 든 적도 많았어요. 2011년에 휠체어를 타고 기사를 썼어요. 진짜 세상이 말도 안 되게 불편한 거예요. 그냥 너무 몰랐던 거예요. 한 지체장애인분이 그러는 거예요. 이럴 거면 한군데 모아놓고 안락사시켰으면 좋겠다고요. 그게 벌써 10년이 다 됐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불편한 게 너무 많아요. 세상이 왜 이렇게 안 바뀌나, 지독하게 원망스러워요. 내가 잘하고 있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기분도 들고요. 기운이 빠져요.

바다: 그렇지요. 원래 변화한다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에요. 그래도 저는 세상이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느껴요. 나무님이 그렇게 되는데 분명 역할을 했을 거예요.

나무: 그럴까요? 제가 바라는 게 커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기자를 하면서 회의감이 든 적도 많아요. 예전에 다녔던 어떤 회사에선, 고발하려고 쓴 제 기사를 광고를 받고 삭제해버렸어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네가 이해하지?"하고 웃었던 상사 표정, 거지 같은 그 기분이 고스란히 기억나요. 기자를 당장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내가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싶었고요.

바다: 정말 그건 너무했네요.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나무님.



"잘해야 한다" 생각에, 점점 지친다고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하루의 힘들었던 일은, 기자를 하며 힘들었던 옛날 일까지 쏟아내게 했다. 그러니 여럿 사소한 일상의 조각들이, 요즘 내 맘을 짓누르는 감정들에까지 다다르게 했다. '왜 이런 얘기까지 나오지', 잠시 그런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아내도 걱정할까 싶어, 시원스레 말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나무 : 좋은 기사를 쓴다고 기억해주시는 독자님들도 조금 생겼어요. 감사한 마음이에요. 그런데 그게 또 다른 부담이 되기도 해요. 잘 써야지, 신중하게 써야지, 이런 생각이 큰 무게감으로 다가와요. 기대하는 이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니 어느 순간엔, 즐겁지 않을 때도 있어요. 성과에 자꾸 집착하게 된다고 할까요. 기사를 안 읽으면 '뭘 잘못 쓴 걸까'하며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요. 자책할 때도 있고요.

바다: 그랬겠어요, 나무님. 그런 마음으로 일했다면, 어쩔 수 없이 지쳤을 것 같아요. 그렇지요?

나무: 맞아요. 예를 들어 토요일 아침에 기사가 나가면, 오후까지도 계속 댓글을 보고 있는 거예요. 응원도 많은데, 안 좋은 의견엔 마음이 쓰이고요. 아내랑 똘이에게 집중해야 할 소중한 휴일에 그러고 있더라고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바다: 그게 오롯이 다 스트레스가 됐을 테고요. 너무 잘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마음이니, 그게 맘처럼 안 됐을 때 실망도 큰 거예요.

나무: 정말 그랬어요. 어떨 땐 차라리, 그냥 날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어요. 그럼 좀 더 편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롭게 쓰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인데, 그게 때론 버거웠나 봐요. 어쩔 땐 아내가 기사 댓글을 보기도 하는데, 안 좋은 걸 보고 맘 아파하면 그걸 보는 저도 너무 속상하고 힘든 거예요. 그랬었어요.

바다: 아무렴요, 가족이 힘들어하는 것만큼 속상한 게 어딨겠어요. 아내분에게 털어놓지 못한 것도 있었겠지요. 그 마음이 너무 이해가 돼요.



"왜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첫 마음을 떠올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어느 순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내 마음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깊이 들어와 있었다. 침이 마르면서도, 얘기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얘기하는 중간중간에, 바다 마음보듬사는 "나무님, 지금 마음은 어때요?"하며 물어봐 줬다. 그러니 마음이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마음속 말들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그걸 누군가 진심으로 들어주고 있단 것만으로도, 어찌나 시원하고 또 개운하던지.

그리 한참 동안 얘길 쏟아내고, 비로소 좀 가뿐해지니, 어둠 속에서 이런 질문이 들려왔다.

바다: 나무님은 왜 기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말에, 오래 잊고 지냈던 기억까지 꺼내놓았다.

나무: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그랬어요. 학원에 갔는데, 애들이 잠자리 날개를 붙잡고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막 뜯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가가서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더라고요. 잠자리가 이미 상태가 안 좋은 거예요. 눈물이 막 났어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옛날부터 그런 걸 보면 마음이 너무 쓰였어요. 남들이 잘 못 보는 그런 걸, 진짜 크게 떠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어르신과 아이, 장애인분들도 그렇고요. 떠도는 강아지랑 동네 고양이도요. "여기 좀 보세요,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하면서,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그런 마음으로 기자가 된 것 같아요.

바다: 맞아요, 그건 정말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좋은 마음인 거예요. 그게 분명 소외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됐을 거고요. 그렇지요? 제가 오늘 귀하고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요.

그리고 3분 정도, 고요히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마음에 귀를 기울여봤다. 가만히 쓰다듬는 느낌으로.

끝날 무렵엔 비로소 알게 됐다. 이 서비스 이름이, 왜 '마음보듬'인지.



마흔부터 시력 잃은, '바다 마음보듬사' 이야기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50분 동안 내 마음을 정성스레 보듬어준, 바다 마음보듬사(48) 이야기를 들었다.

실은 시각장애인이라 했다. 병명은 '망막색소변성증'. 선글라스를 끼고 자리에 앉은 그는, 날 보며 "약간 실루엣이 보이는 정도의 시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사람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독립 보행도 어렵다고 했다.

서른 살 전까진 어린이집 교사를 했다. 시력을 잃어가니 아이들을 돌보기 어려워졌다. 마흔 살부터는 집 밖에 홀로 못 나오게 됐다. 처음엔 일할 생각조차 안 들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단 공포감이 짓눌렀다. 상실감에 인생이 휘청거렸다. 자존감이 떨어졌다. 그는 내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장애가 노출되는 게 싫구나, 내가 예민하구나 알게 됐다. 진정한 마음이 뭔지 보게 됐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보니 선택지가 무척 좁았다. '헬스키퍼(안마사)'가 대부분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공감하는 것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체질이지만, 그에 맞는 일자리가 없었다. 생계를 위해 헬스키퍼가 되긴 싫었다.

그러던 차에 '블라인드 마음보듬'을 알게 됐다. 2017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에서 출발한 '봄: 그늘 협동조합'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어둠 속에서 50분간 공감하며, 깊이 이야길 들어주는 대화 서비스였다. 컴컴한 블라인드 방에선, 시각장애가 장애가 아녔다. 익숙한 어둠은 오히려 장점이 됐다. 바다 마음보듬사는 "그 사람의 소리, 소리에 담긴 그 사람의 내면, 여기에 집중하게 된다"며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느낀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10명에게, 새 삶 찾아준 대학생들


훌륭하지 않은가. 학생들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시각장애인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열정을 쏟는다는 게./사진=한아름 봄 그늘 매니저
훌륭하지 않은가. 학생들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시각장애인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열정을 쏟는다는 게./사진=한아름 봄 그늘 매니저

봄: 그늘을 이끄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무급'을 불사하며 이 일에 뛰어들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좋은 일자리를 만들면서, 동시에 스트레스가 많고 맘이 복잡한 현대인들을 위한 힐링 프로그램을 고안해낸 것이다. 통상 심리상담은 가격이 비싼 편이고, 진입장벽이 높아, 누구나 더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여겼다. 2018년 1월부터 서비스가 시작돼, 현재까지 210명의 고객이 다녀갔다.

아이디어는 성공적이었다. 블라인드 환경이 되니, 고객들이 더 편안하게 얘길 털어놓을 수 있다고 했다. 햇살이란 닉네임의 고객은 "신데렐라가 요정 할머니랑 얘기하는, 동화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팬더 고객은 "상대방의 표정과 시선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아서 편안했다"고 후기를 남겼다. 관찰 받는 느낌이 없어 좋았단 것이다. 평균 서비스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8.9점, 재방문 의사가 92%에 달했다. 많이 다녀간 이는 50회를 채우기도 했다.

더 중요한 건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에게, 좋은 일자리가 생겼단 점이다. '블라인드 마음보듬' 서비스에서 일하는 마음보듬사는 총 10명. 이 중 7명은 일하고 있고, 3명은 아직 교육생이다. 이들 마음보듬사는 철저한 면접과 교육과정을 통해 키워진다. 자체 커리큘럼을 만들어, 전문상담사로부터 이수하도록 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이 일은,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에게 어떤 의미일까. 바다 마음보듬사는 "블라인드 상태에서 얼마든 우리 역량을, 가능성을 발견해줘서 너무 고마운 마음"이라며 "자기 얘길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고 할 때 참 보람이 크다.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 것들로 살 맛이 난다"고 했다. 다른 마음 보듬사들도, 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고.

사회에서 잘 정착해, 더 많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고 싶은 것, 봄:그늘 매니저들 맘이 그랬다. 그러나 어려운 점도 많다.
블라인드 마음보듬 실제 이용후기./사진=블라인드 마음보듬 홈페이지
블라인드 마음보듬 실제 이용후기./사진=블라인드 마음보듬 홈페이지

유연수 매니저는 "학생 신분이라 수업을 듣느라 저녁 시간만 서비스하고 있다. 대폭 늘리지 못하는 것도 아쉬움이 있다. 학생 신분이라 낮잡아보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수익성도 고민이다. 1회당 가격이 2만5000원, 그중 절반이 마음보듬사에게 돌아간다. 공간 빌리는 임대료까지 내고 나면, 수익성이 좋지 않다. 아직 수익이 담보될 만큼 고객이 충분히 늘지 못해서다. 공모전을 통해 아이디어를 내고, 지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유 매니저는 "저희도 시작 단계라 열심히 일궈가고 있는데, 잘 정착돼 인지도를 얻어서, 더 많은 시각장애인 선생님들이 마음보듬사로 참여하고, 힐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 참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시각장애인들의 꿈은 '안마사'여야만 할까



/그래픽=이승현 디자인기자
/그래픽=이승현 디자인기자

통상 시각장애인이 되면 맹학교에서 졸업할 때 안마사 자격증을 딴단다. 실제 공공기관, 대기업과 연계된 '헬스키퍼(안마사)'가 많다. 복지와 급여도 좋은 편이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다가, 헬스 키퍼로 돌아가는 이도 있단다.

헬스키퍼가 하나의 선택지이듯, 그걸 원치 않는 이들을 위한 다양한 일자리도 필요한 것이다. 박주희 실로암 장애인 근로사업장 사무국장은 "중간에 사고나 질병 등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분들이 80% 이상인데, 이들 중엔 더 다양한 직업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안마가 체력적으로 힘든 이유도 있다. 바다 마음보듬사는 "육체를 많이 쓰니, 안마하면서 잔존 시력이 상실되는 분들도 있다. 몸이 피곤하면 약한 부위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생존이 중요하니, 시력 잃을 생각으로 헬스키퍼를 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통계를 보면, 장애인 일자리가 특정 분야에 쏠려 있음이 잘 드러난다. 지난해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장애인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일자리의 27.4%가 '단순 노무 종사자'였다. 반면, 전체 일자리에서 같은 직종 비율은 13.3%로 절반 수준이었다. 장애인 일자리 중 전문가 및 관련 종사자는 8.8%, 관리자는 1.1%에 불과했다. 장애인 실업자의 실업 이유를 조사한 결과, 전체 12.8%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선입견'을 꼽기도 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새로운 직업이 생긴다는 건, 생각지 못했던 꿈을 꿀 수 있게 해준단 의미가 있다. 예컨대, 실로암 근로사업장에선 시각장애인 바리스타 직업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박 사무국장은 "처음엔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바리스타를 하느냐고 부정적으로 봤다"고 했다. 1년간 훈련을 통해 시각장애인 바리스타를 양성했고, 시행착오를 거쳐 이들이 일하는 '카페 모아'란 카페를 열었다.

4일 오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카페 모아'를 찾았다. 시각장애인이자, 50대 바리스타인 재민씨가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맹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바리스타가 됐다. 그의 시력은 오른쪽은 불빛도 안 보이고, 왼쪽은 3분의 2 정도만 보이는 정도다. 그는 "몸은 힘든데 너무 재밌다"고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6일 정도 쉬기도 했는데, 카페에 오고 싶어 혼났단다.
카페모아서 일하는, 시각장애인 바리스타 재민씨. 그가 내놓은 커피를 맛볼 수 있어 다행이다./사진=남형도 기자
카페모아서 일하는, 시각장애인 바리스타 재민씨. 그가 내놓은 커피를 맛볼 수 있어 다행이다./사진=남형도 기자

그가 만들어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다. 커피를 좋아하는 터라 대번에 알았다, 정성이 담겨 있어 맛있다는 걸. "커피가 맛있다"고 했더니 그는 환히 웃었다. 비결이 뭐냐 물었더니 "추출 시간이 25초와 30초 사이에 나오는 게 제일 맛있다"고 했다. 시간을 정확히 보기 위해, 특수 제작된 '확대경'을 쓴다고 했다.

자기가 만든 커피를 매일매일 마시는 사람, 혹여나 손님이 커피를 남기고 가면 '맛이 없었을까' 신경이 쓰인다는 사람, 라떼 잘 만드는 그 직원 어딨느냐고 찾을 때 최고로 기쁘다는 사람. 우유 거품을 붓는 각도까지 신경 쓰는 그 섬세한 손을, 원치 않는 일을 하는데 쓸 수도 있었다.

세상은 다행히 그에게 바리스타 자릴 기꺼이 내어줬다. 그 덕분에 그 많은 이들이 좋은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속마음'을 털어놓았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에필로그(epilogue). 바다 마음보듬사는 마지막으로 이런 얘길 했다.

바다: 나무님, 그동안 참 고생 많았어요. 누군가를 위해, 바깥으로 잔뜩 힘을 쏟느라고요. 그런데요. 그러느라 나무님 마음은 많이 못 돌아본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젠 힘을 좀 빼고, 내 마음을 돌아봐 주세요. 오늘은 내 마음이 이렇구나, 이런 게 좋고 속상하구나, 그렇게요. 그래도 괜찮아요.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손바닥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그랬었지, 이제 기자가 됐으니 잘하겠다며, 부단히 들으러 다녔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든 듣는 게 익숙한 삶이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들어주는 건 꽤 낯설었다. 그게 딱딱했던 맘을 이리 녹일 줄은 몰랐다.

바다: 나무에 물을 주고, 햇볕을 쐬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쑥쑥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테고요. 그 열매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어줄 수 있겠지요?

따사로운 햇살처럼 이어진 한마디에, 애써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부끄럽지 않았다. 그곳은 컴컴한 어둠 속이었으니까.



  • 남형도
    남형도 human@mt.co.kr

    쓰레기를 치우는 아주머니께서 쓰레기통에 앉아 쉬시는 걸 보고 기자가 됐습니다. 시선에서 소외된 곳을 크게 떠들어 작은 변화라도 만들겠다면서요.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마음 간직하려 노력합니다. 좋은 제보 언제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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