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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거짓말에 속아 강간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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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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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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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살롱] 법원, '강간상황극' 꾸민 성폭행 교사범에 징역 13년·실행범은 무죄

삽화=이지혜 디자인 기자 / 사진=이지혜
삽화=이지혜 디자인 기자 / 사진=이지혜
"이게 판결이냐? 실수로 사람을 죽여도 살인인데 착각해서 강간하면 무죄?"
"여성분 당연히 저항했을 텐데…나 참 기가 막혀서"
"법리적으론 문제가 없다고 해도,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판결"

지난 4일 대전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김용찬)의 판결 선고가 내려진 후, 온라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

랜덤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에 '강간 상황극을 원한다'는 내용의 거짓 글을 올려 성폭행 사건이 벌어지게 한 남성이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법원은 상황극인 줄 알고 성관계를 실제 한 남성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사건이 일어난 경위도, 판결도 황당하기만 한 이 사건. 어떻게 된 일일까.




"강간당하고 싶다"며 다른 남성에게 피해 여성 주소 알려준 남성


남성 이모씨는 지난해 8월 랜덤 채팅 앱 프로필을 35세 여성으로 꾸민 뒤 "강간당하고 싶은데 만나서 상황극 할 남성을 찾는다"는 글을 올렸다.

이 앱의 회원이었던 남성 오모씨는 해당 글에 관심을 보이며 이씨에게 연락했다. 이씨는 오씨에게 본인 집 근처 원룸 주소를 알려주며 자신이 그곳에 사는 것처럼 속였다.

오씨는 이씨가 알려준 주소로 향했고, 원룸에 강제로 들어가 그곳에 있던 피해 여성을 성폭행했다.

이씨는 피해 여성의 집 주변에 몰래 숨어있다가 오씨가 성폭행하는 장면을 훔쳐봤던 것으로 밝혀졌다. 피해 여성과 오씨, 이씨는 모두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검찰은 이씨에게 주거침입 강간 교사 등 혐의를 적용하고 오씨에게는 주거침입 강간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검찰은 결심 공판에서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고 인격을 존중하지 않은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며 이씨에게 징역 15년을, 오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재판부 "강간범 역할한 이에게 죄 물을 수 없어"


오씨의 유·무죄 판단을 가른 쟁점은 오씨에게 '고의'가 있었는가, 혹은 '미필적 고의(본인 행위로 어떤 범죄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했음에도 행동한 것)'라도 있었는가였다.

법원은 오씨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오씨가 강간 상황극이 아니라 실제인지 알면서 범행을 했다는 의심이 든다"면서도 "그러나 오씨는 이씨에게 속아 강간범 역할을 하며 성관계를 한 것으로 보여, 실제 피해자에 대한 강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등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모든 증거를 종합할 때 오씨는 자신의 행위가 강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거나, 알고도 용인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씨에게 속은 나머지 강간범 역할을 하며 성관계한다고만 인식한 것으로 보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법조계 "재판부의 고민, 이해하지만…"


법조계는 재판부가 '미필적 고의'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예현)는 "법리적으로 봤을 때 아주 납득 불가한 판결은 아니다"면서 "강간을 실행한 사람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었는지 의문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적어도 과실은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며 "만약 피해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한다면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은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박찬성 변호사(고려대 인권센터 자문위원)는 "재판부는 증거에 따라 인정될 수 있는 사실관계에 비춰 볼 때 오씨가 실제로도 상황극이라고 완전히 오인하고 있었던 것일 뿐 정말로 강간을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박 변호사는 "강압적인 상황 하에서 물리력의 행사를 수반한 성행위가 실제로도 있었을 텐데 이때 피해자도 거부를 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며 "하지만 그럼에도 재판부가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인지, 이 부분은 다소 의문이 든다"고 의견을 밝혔다.

오씨가 성폭행을 하는 도중에도 이게 도저히 성폭행이라고 느낄만한 요소가 없었다면 무죄 판단이 납득 가능하지만, 피해자가 명백히 거절 의사를 밝히는 등의 사정이 있었을 경우 무죄는 납득 불가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결국 정확한 판단은 기사나 판결문에 나오지 않은 세부 사건 기록을 살펴봐야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계기로 성폭력 사건에서 미필적 고의에 대한 인정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판결에서도 알 수 있듯, 법원이 그간 성폭력 관련 사건에서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는 범위는 매우 한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범위의 설정이 최근 법조계의 화두인 '피해자 중심주의'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보다 깊어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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