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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시인아, 말들의 불을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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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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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박태건 시인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시인의 집]시인아, 말들의 불을 밝혀라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시와반시’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태건(1971~ )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는 홀로 가을 숲이나 논둑길을 걷는 것 같은 잔잔한 풍경을 자아낸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것들은 시인의 기억과 상처를 만나 삶의 무늬를 드러내고, 시로 태어난다. “생각이 생각에 잠겨/ 핏물이 배어나올 것 같”(‘폭염주의보’)은 정중동의 세계다. 고요하지만 고요하지 않다.

등단 25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어떤 슬픔에도 아프지 않”(‘가족사’)을 만큼 단단한 삶의 옹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옹이는 나무에 박힌 돌멩이”(이하 ‘결’)처럼 곧은 성장을 방해한다. 자꾸 삶의 결이 어긋나 가족을 힘들게 한다. “늦도록 혼자 사는 형”은 바로 눕지 못하고, 아버지는 “직장에서 밀려난 지 삼 년”(‘양파’)이 되었고, “동생은 노조와도 싸웠던 경험”(‘가족 식사’)이 있다. 그래도 가족은 “숨구멍을 만”(이하 ‘결’)드는 장작처럼 “서로 기대어” 산다.

시인의 가족사는 슬프다. 특히 먹고사는 문제에 이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인은 “콩나물 도라지 무생채 냉장고에 시드는 풋것들 고추장에 참기름까지 다 넣고”(이하 ‘오래된 저녁’) “막사발에 보리밥을 비벼”먹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현실은 “살아 있는 걸 먹지 못”(이하 ‘가족 식사’)하는 “엄마, 아빠, 형”과의 식사조차 불편하다. 덩달아 먹지 못한다. “상처를 받으면 울음을 돌려주던”(이하 ‘구부러진, 힘’) 힘겨운 시절을 견디며 깨달은 건 아직 “반듯하게 자란/ 나뭇가지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늙은 아버지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장맛비 오는
전주의 오래된 식당인데
식탁은 좁아서 우린 한 식구 같다

혼자 온 사람, 함께 온 사람, 늙은이, 젊은이, 양복쟁이, 츄리닝……
한 그릇의 국밥에 머리를 숙인다
식당의 강아지도 머리를 숙인다

나는 아버지의 수저에 깍두기 한 알을 얹으며
비 내리는 창문에 CT 모니터 속의
아버지의 주름과 갑작스런 나의 실업과
어느새 흘러간 것들을 생각한다

어떤 순간은 기도 같아서
비긋는 좁은 처마 아래
우린 한 식구 같다

- ‘도가니 집’ 전문


늙은 아버지는 자주 아팠을 것이고, 바쁘게 사느라 병원에 모시고 갈 시간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실업으로 시간이 나자 아들은 아픈 아버지를 모시고 전주에 있는 큰 병원에 간다. 아버지는 괜찮다며 몇 번 손사래를 치다가 마지못한 듯 아들을 따라나섰을 것이다. 하필 비가 내린다. 병원에서 CT 촬영을 하고, 모니터를 보면서 의사의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병원을 나선 부자는 오래된 도가니 집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로 간다.

“혼자 온 사람, 함께 온 사람, 늙은이, 젊은이, 양복쟁이, 츄리닝……” 고개를 숙이고 국밥을 먹는 사람들이 남 같지 않다. 끼니때를 놓친 사람들의 뒷모습은 왠지 슬프다. 부자는 말없이 도가니탕에 밥을 말아먹는다. 굳이 아버지의 병명을 말하지 않아도 “기도”라는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문득 아버지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다시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인은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것이다.

결혼 전, 노래를 불러주면 돈은 자기가 벌겠다며 천사의 미소를 짓던 아내가 아침에 출근한 옷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있다 늦은 밤, 고등학생 딸을 데리러 가야 한다는 아내의 목소리가 갈라졌으므로 나는 읽던 시집을 덮는다 돈과 싸우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과 싸우지 않으려 해도 돈은 필요하다

- ‘돈 술 노래’ 부분


아내의 출근복이 얇아지는 계절에, K는 설거지를 하고 빌라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운다 건너편 빌라에는 얇은 옷을 걸친 여자가 빨래를 넌다 아내가 무서운 K는 난간을 벗어난다 더위는 옥상부터 달군다

- ‘K의 그런저런 문제’ 부분


정말 그랬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만 있어도, 곁에서 노래만 불러줘도 좋았을 것이다. 사랑은 희생을 전제로 한다. 나를,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쓴 시를 직접 읽어준다면 마냥 행복할 것 같은 시절엔 사랑과 젊음과 시 앞에서 돈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생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어 시인 남편을 먹여 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부족한 것을 얼마든지 내가 채워줄 수 있다.

결혼은 현실이다. 함께 살면서 늘 좋을 수만은 없다.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서운한 감정이 찾아온다. 실직한 시인은 집에 있으면서 살림을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아내가 출근하면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밀린 빨래를 해 옥상에 널기도 한다. “건너편 빌라”에서 빨래를 널던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쑥스럽다. 다음엔 아내가 내일 입고 갈 옷을 다린다. 대낮에 밖에 나갈 때면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져 괜히 위축된다. 아내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밥을 하며 시집을 읽는다.

퇴근한 아내는 “출근한 옷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쉬고 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 시인은 옷이라도 벗고 편히 쉬라고 한마디 한다. 조금 쉬다가 “고등학교 딸을 데리러 가야” 하는 아내는 만사가 귀찮다. 너무 피곤해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다. “아내의 목소리가 갈라”지자 시인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 나 때문에 아내가 고생한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든다. 미안한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교차한다. 술 한잔 마시고 싶지만, 불러낼 사람이 없다. “돈과 싸우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자책은 “평생 칼을 맞는”(‘도마’) 도마를 떠올리게 한다.

고요히 비 맞고 선 들녘에선
들풀 하나에도 머리 숙여 인사하고 싶다
수평선에서 지평선으로
구름이 풀리는 걸 보면
세상에 가둬 놓을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

논물 벙벙히 차는 시간과
수로水路의 물이 지평선에 닿는 거리와
어린 모 겨드랑이를 쓱쓱 훔치며 흘러가는 마음에는
푸른 들판이 파도치듯
와와, 몰려가고

파란 하늘도 귀퉁이부터 쓰러지는 날에는
초록비 오는 들판에 퍼질러 앉아
수제비국 같은 구름 한 바가지씩 푸짐하게 나눠 먹으며
종아리 박고 서 있는 어린 모처럼
입을 벌려 쏟아지는 빗물을 받아먹고 싶다

산 첩첩 물 굽이굽이 들꽃마을에서도
새벽길 밟으며 피어나는 풀꽃마을에서도
멀고 가까운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도
저 빗소리 듣고 있을 테니
여린 벼 잎처럼 살고 있을 테니

하여 방죽의 토란대들도 넓은 귀를 기울여
빗방울처럼 외로워질 것이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염없이 고개 수그리고 싶을 것이니
하염없이 흔들리고 싶을 것이니

- ‘비 오는 들녘’ 전문


이번 시집에는 유난히 비를 노래한 시가 많다. 특히 비포장 주차장에 내리는 비를 통해 기억과 상처를 떠올린 시 ‘상처의 무늬’와 아스팔트길에 고인 빗물에서 “벽이었던 길이 다시 태어나는/ 찰라”를 포착한 시 ‘물의 배꼽’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묘사, 경험적 사고를 잘 형상화한 좋은 시다. 오래 시를 잡고 갈무리한 시적 역량이 잘 드러난다.

“이제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이름을 지어주리라”고 노래한 시 ‘짓다’도 눈길을 끌지만, 시 ‘비 오는 들녘’은 단연 돋보인다. 시를 읽고 눈을 감으면 비 오는 들녘이 촉촉이 가슴을 적신다. “들풀 하나에도 머리 숙여 인사하”는 시인의 선함이 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시인 옆에 나란히 앉아 “입을 벌려 쏟아지는 빗물을 받아먹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여린 벼처럼 살고 있을” “가난한 사람들”과 “하염없이 흔들리”며 살아도 좋고, “빗방울처럼 외로워”도 행복할 것 같다. 이제 “뭔가 금지된 걸 시도해도”(‘시인의 말’) 될 것 같다.

시인아!
망치를 들어 어둠을 깨라
말들의 불을 밝혀라

- ‘촛불’ 부분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박태건 지음. 모악 펴냄. 112쪽/1만원.


[시인의 집]시인아, 말들의 불을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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