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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③ 평양성 북성(北城)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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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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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으로 변모해 평양의 대표적 명소로 자리매김 고구려 평양성의 성곽과 문루를 만나는 공간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고구려 때 처음 쌓은 평양성의 북성(北城)은 모란봉을 끼고 축성됐다. 원래 모란꽃을 닮은 금수산의 봉우리 이름이었던 모란봉이 언제부턴가 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됐다. 현재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많은 평양 시민들이 찾는 공원으로 변모돼 있다. 북한에서는 아름다운 경치와 고즈넉한 평양성의 누각, 현대적인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도의 정원'이라고 선전한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할 목적으로 축성되고 계속 보수되어온 평양성 외성은 일제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공원으로, 평양을 대표하는 명소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동강에서 바라다 본 모란봉과 평양성 북성의 문루들. 왼쪽이 전금문, 오른쪽이 부벽루다. 멀리 봉우리 정상에 을밀대가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 뉴스1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동강에서 바라다 본 모란봉과 평양성 북성의 문루들. 왼쪽이 전금문, 오른쪽이 부벽루다. 멀리 봉우리 정상에 을밀대가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 뉴스1

모란봉 산책은 통상 평양성 내성의 북문인 칠성문에서 시작된다. 먼저 보통문(普通門, 국보유적 제3호)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 천리마거리 시작점에 있다. 이 문은 고구려시기 평양성 중성의 성문으로 수도성을 쌓은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웠다. 지금의 것은 1473년에 중건한 것이다. 보통문은 듬직한 축대와 무게 있는 2층 문루로 이뤄졌다. 축대의 높이는 6.5m이며, 그 가운데에 무지개 문길을 냈다. 문루는 앞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의 겹처마합각집이다. 보통문은 예로부터 '보통송객'(보통문에서 손님을 바래주는 광경)으로 평양 8경의 하나로 전해진다. 6?25전쟁 때 엄청난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려시기 평양성 중성의 성문으로 처음 건설한 보통문. 현재의 모습은 15세기에 중건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고구려시기 평양성 중성의 성문으로 처음 건설한 보통문. 현재의 모습은 15세기에 중건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평양 보통문과 주변 풍경. 보통강에서 빨리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평양 보통문과 주변 풍경. 보통강에서 빨리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보통문에서 만수대를 지나 모란봉 초입에 도착하면 칠성문(七星門, 국보유적 제18호)이란 이름은 북쪽을 가리키는 '북두칠성'에서 '칠성'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010년 고려는 거란군이 침략했을 때 칠성문 앞에서 패퇴시켰고,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전투 때 군인과 의병들이 칠성문으로 제일먼저 들어가 왜적을 물리친 적도 있다.

예로부터 칠성문은 '행복의 문' '사랑의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칠성문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고구려 때 돌범이라는 총각이 '시내'라는 처녀를 사랑했지만 시내의 아버지는 칠성문도 드나들지 못하는 녀석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돌범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무사가 된 다음 시내와 결혼할 것을 다짐하고 3년을 기한으로 집을 떠나면서 시내에게 기다려줄 것을 부탁하지만 5년만에야 마을에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시내는 시집을 가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온 돌범은 뜻밖에도 집에 와 있는 시내와 만나게 된다. 시내는 돌범의 집으로 시집와 있었던 것이다. 이 전설 덕분인지 칠성문은 지금도 사랑을 속삭이는 평양 청춘남녀들의 인기 산보(데이트) 길이자 결혼식 사전촬영지다.

1960년대 촬영된 평양 모란봉 전경. 앞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모란봉극장, 역사박물관(김일성광장 옆으로 이전), 을밀대, 최승대, 청류정의 모습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1960년대 촬영된 평양 모란봉 전경. 앞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모란봉극장, 역사박물관(김일성광장 옆으로 이전), 을밀대, 최승대, 청류정의 모습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칠성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지고 922년(고려 태조 5)에 고쳤다. 1711년(조선 숙종 37)에 다시 지었고, 문루는 1764년(조선 영조 40)에 다시 지었다.

칠성문은 적이 공격하기에는 힘들지만 성안에서 적을 공격하기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보통문과 함께 의주 방면으로 통하는 성문 역할을 했다. 문루는 정면 3칸(7.39m), 측면 2칸(4.36m)의 단층 팔작집이다. 흘림기둥을 사용했으며, 정면 가운데 부분은 아래의 홍예문을 피해 조금 넓게 잡고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평양 칠성문의 측면 전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 칠성문의 측면 전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칠성문에서 동쪽으로 북한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모란봉극장이 보인다.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열린 곳이다. 여기서 다시 길을 재촉해 산을 오르면 을밀대(乙密臺, 국보유적 제19호) 에 닿는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평양팔경의 하나인 '을밀상춘'(乙密賞春:을밀대에서 바라보는 봄 경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평양기생들이 평양 모란봉 을밀대 앞에서 촬영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일제강점기 때 평양기생들이 평양 모란봉 을밀대 앞에서 촬영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을밀대는 고구려 평양성 내성 북장대터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을밀대란 이름에 대해서는 '웃미루터'(읏밀이언덕)에서 유래됐다는 설, 옛날 '을밀 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여기서 놀았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설, 고구려 때 '을밀 장군'이 이곳을 지켜 싸웠다는데서 온 이름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고구려 평양성 내성 북장대터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누각인 을밀대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고구려 평양성 내성 북장대터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누각인 을밀대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을밀대는 6세기 중엽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건설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됐다. 높이 11m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 을밀대는 사방이 탁 트인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사허정'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최승대(最勝臺)가 있었는데 1714년(조선 숙종 40)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최승대를 모란봉 꼭대기로 옮겨가고 누정을 다시 지었다. 축대 위에 세운 누정은 정면 3칸(7.5m), 측면 2칸(5.3m)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상부구조는 5량가 형식이다. 비바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높이 1m 정도의 4각 돌기둥 위에 흘림기둥을 세우고 2익공 공포를 얹었다.

일제강점기 때 평양에 수학여행을 오거나 가족단위로 모란봉을 오른 주민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명소이기도 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일행도 을밀대에 올라 기념사진을 남겼다.

을밀대에서 내려오면 현무문(玄武門)을 만날 수 있다. 평양성의 북성을 쌓을 때 처음 금수산(錦繡山)에 세운 북문으로, 사신 가운데서 북방 방위신으로 되어 있는 현무에서 이름을 땄다. 현재 북의 보존유적 제1호(보물급)로 지정되어 있다.

평양성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진 현무문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 뉴스1
평양성 북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진 현무문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 뉴스1

현무문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오르면 금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자리한 최승대(最勝臺, 국보유적 제21호)에 이른다. '경치를 감상하는데 제일 좋은 곳'이라는 의미인 최승대는 평양의 전체 경치를 감상하는 데도 최고로 꼽힌다. 대동강 한복판의 능라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동평양과 서평양의 모습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최승대 자리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 북성의 북장대터다.

평양 모란봉 정상에 있는 최승대에서 바라다 본 대동강과 평양 전경. 일제강점기 때의 모습으로 최승대는 평양의 전체 경치를 감상하는 최적지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 모란봉 정상에 있는 최승대에서 바라다 본 대동강과 평양 전경. 일제강점기 때의 모습으로 최승대는 평양의 전체 경치를 감상하는 최적지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 모란봉 정상에 세워진 최승대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 모란봉 정상에 세워진 최승대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최승대에서 다시 올라갔던 길로 내려오다 보면 대동강 쪽으로 전금문(轉錦門, 국보유적 제22호)이 멀리 보인다. 평양성 북성의 남문으로, 한쪽으로 모란봉을 끼고 대동강에 면해 있다. 1714년(숙종 40)에 중건되었으나 6?25전쟁 중 파괴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1959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금문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평양성 북성의 남문으로 처음 건설됐다가 1959년에 복원된 전금문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성 북성의 남문으로 처음 건설됐다가 1959년에 복원된 전금문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전금문은 성벽과 직각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 1714년 북성 재건 때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을 냈다. 축대 위의 문루는 정면 3칸(7.4m), 측면 2칸(4.4m)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청류벽 아래 대동강 뱃길과 연결되는 관문으로 사용됐고, 성문 내에는 부벽루(浮碧樓, 국보유적 제17호)와 영명사(永明寺)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영명사는 392년(고구려 광개토대왕 2)에 창건되어 평양팔경의 하나로 손꼽혔으나 1894년 청일전쟁 때 거의 불타버렸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다시 지었으나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부속건물인 부벽루와 5층탑만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영명사터 인근에 초대소가 들어서면서 아쉽게도 외부인의 접근이 통제돼 있다.

일제강점기 때 평양기생들이 평양 부벽루 앞에서 촬영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일제강점기 때 평양기생들이 평양 부벽루 앞에서 촬영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전문금 안쪽의 부벽루는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서 있는 정자이다. 본래 393년에 창건한 영명사의 부속건물로, 그때는 이름도 영명루라고 불렀다. 그 후 12세기에 이르러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불렀다. 부벽루는 뛰어난 건축술과 아름다운 경치로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조선 3대루의 하나로 이름 높았다. 특히 부벽루는 달맞이 구경이 황홀하여 '평양 8경'(부벽완월)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 때 평양감사가 부임하면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부벽루에서 연회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봄 평양의 한 가족이 모란봉에 올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바로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청류정이고, 그 뒤로 영명사와 부벽루가 보이고, 정상에 서 있는 최승대가 멀리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봄 평양의 한 가족이 모란봉에 올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바로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청류정이고, 그 뒤로 영명사와 부벽루가 보이고, 정상에 서 있는 최승대가 멀리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을밀대에서 평양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청류정(淸流亭, 국보유적 제20호)이 나온다. 청류정은 낮은 기단 위에 정면 3칸(11.1m), 측면 2칸(6.2m)으로 세운 팔작지붕의 단층 정자이다. 본래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서문인 정해문의 문루였다. 정해문은 조선시기에 평양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1716년에 고쳐 세웠으며 1927년 정해문을 없애고 그 문루를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청류벽의 이름을 따 청류정이라고 부르게 됐다. 청류정은 6·25전쟁당시 피해를 입었다가 1959년 옛 모습대로 복구됐다. 문루 건물의 부재를 그대로 가져와 옮겨지었기 때문에 문루건축의 특징이 있는 정자이다.

평양성 정해문의 문루를 옮겨온 청류정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성 정해문의 문루를 옮겨온 청류정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청류정에서 다시 모란봉극장 쪽으로 계속 내려오면 해방탑이 나온다. 항일전투에 참여한 소련군을 기리기 위해 1946년 8월에 세운 탑이다.

모란봉을 내려와 대동강을 따라 걸으면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이 나오고, 옥류교를 지나면 연광정(練光亭, 국보유적 제16호)과 대동문(大同門, 국보유적 제4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광정은 평양성을 건설하면서 처음 세웠고, 1111년(고려 예종 6) 현재의 자리에 다시 정자를 세우며 이름을 '산수정'이라고 했다. 그 뒤 보수?재건하면서 연광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현재의 정자는 167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은 두 개의 다락을 조금 비끼어 맞물려 세워져 있다. 남쪽 누각은 정면 3칸(11.35m), 측면 3칸(9.2m)이고 북쪽 누각은 정면 2칸(6.15m), 측면 4칸(11.02m)이다.

평양성 건설 때 처음 지어졌고, 17세기에 개건된 연광정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성 건설 때 처음 지어졌고, 17세기에 개건된 연광정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연광정 일대에서는 연대가 서로 다른 글자가 새겨진 기와 20여 종이 발견되어 여러 차례 보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광정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누각에는 '천하제일강산'이란 현판과 함께 기둥에 고려 때 시인 김황원의 시구를 적은 글씨가 걸려 있다. "장성일면 용용수(長成一面 溶溶水), 대야동두 점점산(大野東頭 點點山)"라고 쓰여 있다. 동행한 해설강사가 이 글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어느 날 부벽루에 올라 누에 걸어놓은 현판들을 본 시인 김황원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 떼어버리고는 자기가 시를 짓겠으니 그것을 새겨 붙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김황원은 청류벽을 감돌아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과 간 건너편에 펼쳐진 경치를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시를 써나갔다고 해요.

'긴 성벽기슭으로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 있네.'


평양 연광정 기둥에 걸려 있는 고려 시인 김황원의 글씨.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 뉴스1
평양 연광정 기둥에 걸려 있는 고려 시인 김황원의 글씨.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 뉴스1

여기까지 써나가던 김황원은 다음의 시구를 쓰자니 자기의 시 재간이 평양의 경치를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하다는 생각이 문득 앞을 가로막아 절망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만 붓대를 꺾어 던지고 한탄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가 채 쓰지 못한 시 글씨판(주련)은 그후 연광정의 기둥에 옮겨져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광정 옆에는 아담한 종각이 하나 서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평양종(국보유적 제23호)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다. 이 종이 처음 주조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옛날 대동문 문루 위에 달려있던 것을 1714년(숙종 40년)에 평양성의 북성을 쌓으면서 북장대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후 화재가 일어나 종이 깨여지자 1726년(영조 2년)에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종을 주조하여 당시 객사였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짓고 종을 달아 놓았다. 1804년(순조 4년)에 큰 화재로 또다시 종각이 불타 1805년(순조 5년)에 고쳐지었다고 한다. 1827년 6월 24일 지금의 위치에 종각을 옮겨 세우고 종도 옮겨 달았다.

종의 크기는 높이 3.1m, 무게 13.5t에 달한다. 종두에는 쌍룡(청룡과 황룡)틀임을 조각하였는데 그 생동한 모습은 조선시기 금속 주조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평양종각 옆에 대동문이 장대하게 서 있다. 6세기 중엽에 지은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평양의 6대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큰 성문이었다. 지금 건물은 1635년에 재건했다가 6·25전쟁 당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원상복구한 것이다. 문루에는 박위가 쓴 '읍호루'라는 현판과 양사인이 쓴 '대동문'이라는 현판이 지금까지 걸려있다. '읍호'는 문루에서 손을 드리워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뜻으로 강가에 지은 대동강의 특징을 잘 표현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대동문과 주변 거리. 현재 대동문 앞 건물들은 모두 철거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대동문과 주변 거리. 현재 대동문 앞 건물들은 모두 철거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건설된 대동문 전경. 현재 건물은 6.25전쟁 이후 복구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처음 건설된 대동문 전경. 현재 건물은 6.25전쟁 이후 복구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31.© 뉴스1

대동문은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은 정교한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문루로 이뤄져 있다. 문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축대 높이는 6.6m이며, 축대 복판에 무지개 문길이 있다. 축대 위에 세운 2층 문루는 앞면 3칸(15.91m), 측면 3칸(10.34m)이다. 1, 2층의 공포는 모두 안팎 3포의 포식공포를 얹었다. 대동문은 고려시대의 건축물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형식과 구조상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 성문 건축물로 꼽힌다.

칠성문에서 대동문까지 이어지는 모란봉 산책길은 고구려 때 쌓은 평양성의 유적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남북이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옥류관 냉면을 먹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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