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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들의 나라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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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1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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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환자가 하루 600명 이상 나오면서 불안이 고조되고 있지만 지난 3월 1차 확산 때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때는 기본적인 방어막인 마스크를 맘대로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이 패닉을 불렀다. 부랴부랴 수립한 공적마스크 공급 체계가 작동하고야 불안의 강도를 낮출 수 있었다.

마스크 공급에 숨통이 트이게 한 대기업이 있었으니 삼성전자다.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마스크 완제품 수십만 장을 공수해 국내에 기부하고, 마스크 원자재인 MB필터를 들여왔다. 마스크 제조업체들에게 제조공정을 개선해주고 기술을 전수해 마스크 생산량을 2배 이상 늘리게 했다.

이런 사실 중 일부는 지난 8일 무역의 날에 금탑 산업훈장을 수훈한 김현석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공적서에 기재됐다. 훈장은 김 대표 개인에게 줬지만 삼성전자라는 기업의 공이다.

연초 코로나19로 실물경기가 급속히 위축될 조짐을 보이자 제2의 IMF가 올 거라는 위기감 또한 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2의 외환위기는 없었다.

1997년과 98년에는 높은 환율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지금은 오히려 낮은 환율을 걱정한다. 외환보유액은 IMF 때 39억달러까지 줄어들어 당장 기름 사올 달러를 걱정해야 했다. 지금은 사상 최대인 4364억 달러로, 세계 9위 규모다. 환율이 안정돼 있기에 통화정책 운신의 폭이 넓고, IMF 때처럼 살인적인 금리에 짓눌리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경상수지가 흑자를 유지하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지난 10월 경상수지 흑자는 116억6000만달러로, 3년래 최대 규모였다. 특히 상품수지 흑자가 101억5000만달러에 달했다. 전세계가 코로나 패닉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 기업들이 선전한 덕분이다.

3분기 경제성장률이 2.1%로 나왔는데, 성장을 떠받친 것 역시 기업들의 수출이었다. 3분기 민간소비가 정체된 가운데 수출은 전분기보다 16.0% 늘었다. 1986년 1분기(18.4%)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처럼 우리가 위기를 덜 체감한 데는 여러모로 기업의 역할이 컸다. 기업이 구원투수로 자리매김한 것은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소득주도 성장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소득주도 성장이 정책 입안자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의도한 대로 우리 경제에서 소비의 비중이 커졌다면, 코로나19 확산으로 소비가 마비되는 상황에서 재앙이 됐을 것이다.

기업의 긍정적인 역할에 비해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기업의 목소리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 한해 한국 경제는 OECD 국가 가운데 성장률이 가장 높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고 수출도 반등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올 한해 경제 운용을 대단히 잘해줬다”며 기업이 아닌 홍남기 부총리를 비롯한 정부 경제팀에 공을 돌렸다.

기업이 미래를 설계할 때 중요한 지침이 될 경제3법과 노조법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부 여당은 경제단체들이 낸 대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법인세 증세, 고용보험 강화 등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데서도 기업의 입장은 소외됐다.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기업은 탐욕의 화신으로 취급했다.

현 정부 들어 부동산 정책이나 소득주도성장 정책 등이 불러온 주거불안과 저숙련노동자 고용 위축 등 부작용은 사회갈등으로 비화하고 있다. 기업정책 역시 이상만 강조되고 현실은 도외시할 경우 위기 때마다 버팀목이 돼 온 귀중한 자산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기업은 10년, 20년을 내다보고 투자를 한다. 정권이 존속하는 기간보다 길다.

역대 정부에서 위기극복의 본보기를 찾으라면 DJ정부를 들 수 있다. IMF라는 위기를 극복해 내고, 20년 IT(정보기술) 강국의 기초를 다졌던 김대중 대통령의 지론은 ‘서생(書生)적 문제인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는 것이었다. 원칙을 중시하고 옳은 것을 지켜야 하지만, 그걸로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권이 성공하려면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검증되지 않은 유토피아 설계도 한 장만 달랑 들고 있는 서생들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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