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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나를 살라 재가 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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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1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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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조명 시인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시인의 집]나를 살라 재가 될 사랑
2003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한 조명(1955~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는 “사랑이라는 말이 있기 전”(‘파린의 계절’)에 존재하는 ‘진(眞)’의 세계를 지향한다. ‘참된, 변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뜻을 가진 진(眞)은 “어리디어린 것”(이하 ‘시인의 말’)이 머무는 원형(본질)의 세계이다. 시인은 이를 ‘파린’이라 한다.

프랑스어로 가루를 뜻하는 파린(farine)은 흙이 되기 이전의 상태이면서 말을 배우기 전의 순진무구한 아이의 심성, 혹은 시를 비롯한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말한다. 한마디로 신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뮈토스(mythos)라 할 수 있다. 아이는 ‘사랑’이라는 말을 배우기 전에 이미 사랑의 감성으로 충만해 있다. 뮈토스와 달리 로고스(logos)는 모든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고, 일정하게 하는 형식이다.

12년 만에 낸 이번 시집에서 조명 시인은 기독교·불교·힌두교 등의 종교와 그리스로마신화·북유럽신화·인도신화·중남미신화·동남아신화 등의 신화, 무속과 민담 그리고 우주물리학의 세계를 거침없이 넘나든다. 시인의 해박한 인문학적 소양은 삶의 경험과 철학, 여러 사물을 만나 시로 태어난다. 특히 단순한 것 같은 문장에 감춰진 뮈토스와 로고스, 인간의 유한성과 자연의 순환성을 눈치채지 못하면 “늙은 꿈”(이하 ‘시인의 말’)에 안겨 있는 “햇꿈”을 놓치고 만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자. 기독교의 천지창조 이전이나 신화의 뮈토스는 신이나 자연, 인간 등을 분화되지 않은 단일한 것으로 본다. 뮈토스 외에 아무것도 없으며,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은 일체이거나 거의 붙어 있다. 하지만 이성과 문명이 지배하는 로고스는 삶과 죽음, 생로병사,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공존한다. 뮈토스는 아이나 겨울, 로고스는 성인이나 봄을 상징하다.

한번, 태어나 볼까요?
아랫녘으로 내려갈수록 물색 짙어지는 봄날
태양은 빛의 구멍을 열어 색의 연풍을 보내 주어요
나는 바야흐로 색의 씨앗, 당신은 빛의 씨앗
흠 없는 외로움 흠 없는 그리움을 서로 알아요
애초의 어둠 속 반짝임을 알아요
반짝임은 사랑의 핵, 생명을 만들죠
수원 떠나 옥천 지나 금강 건너 금산 골짜기 돌샘
애타는 당신 지상의 이슬방울들 물들일 때
초록 목덜미와 다홍 가슴으로 발색하는 외로움
청남색 등때기와 홍자색 배때기로 발색하는 그리움
청홍 자웅 아지랭이 진동합니다
나는 바야흐로 몸의 씨앗, 당신은 존재의 씨앗
토우의 심장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루라(迦樓羅)처럼
귓불 지나 유두 지나 소름 돋는 합일의 벼락처럼
당신,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태양이 먼지로 사라질 때까지 벗을 수는 없죠
한 마리 자연 속 한 마리 자연으로
한번, 태어나볼까요?

-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전문


세계의 창세신화는 태초에는 카오스(chaos), 즉 혼돈 상태였으며, 신은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 특히 흙으로 빚어 생명을 불어넣는다. 흙 이전의 가루 상태가 ‘파린’이다. 사계 중 생명이 멈춰 있는 겨울이 바로 “파린의 계절”(이하 ‘파린의 계절’)이며, “흙에서 떠나보낸 모든 하늘아이 흙에서 부활”한다. 겨울과 달리 봄은 사랑이 잉태하는 계절이다.

표제시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는 “한번, 태어나 볼까요?”라고 시작해 “색의 씨앗”인 나는 신에 의한 탄생이 아닌 자율의지임을 선언한다. 봄은 남쪽에서 오지만 “흠 없는” 씨앗은 머리로부터 “아랫녘으로 내려”간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당신과 위에서 내려가는 나는 서로 그리워하는, 사랑하는 관계로 “생명을 만”든다.

신화와 봄날 이미지에서 “수원 떠나 옥천 지나 금강 건너”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느닷없을 수도 있지만, 나와 당신이 만나는 “금산 골짜기 돌샘”이 시인의 고향이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만나자 급격히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홍 자웅 아지랭이 진동”한다. “색의 씨앗”인 나는 “몸의 씨앗”이 되고, “빛의 씨앗”인 당신은 “존재의 씨앗”이 된다.

“토우의 심장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루라(迦樓羅)”는 인도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큰 새로 금시조(金翅鳥)라고도 한다. 신화에서 태양은 신성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고 숭배한다. 금시조인 가루라는 태양신과도 연관되고, 가루라의 ‘가루’와 “태양의 먼지”는 파린을 연상시킨다. 당신과의 합일 이후 내가 “자연 속 한 마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소멸적 인간에서 순환하는 자연으로의 변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는 신화적 상상력과 계절의 변화를 통해 나의 탄생을 조명하고 있다.

한 여인이 신을 낳았다
요정이 아니라 여신이 아니라 여인이
신을 낳았다
번개와 독수리의 하늘을 불러들여
굉음과 섬광의 궁륭에서
사랑과 질투의 도회지에서
비커와 샬레의 실험실에서
바람과 햇살의 하모니를 밟고 넘어가는 열애의 밤
횃불을 치켜들고 깃털펜을 흔들며
인식의 북을 치는 엑스터시의 밤
은산철벽을 허물어
살갗 뚫고 갑옷 찢으며 뿜어내는 애신의 광휘에
혼신으로 재가 된 사랑의 끝
한 여인이 잿무덤 속에 신을 낳았다
비련의 세멜러 애련의 세멜레 시인의 어머니 세멜레
당신은 신을 창작했다 그리고
신이 되었다
올여름 내내 하늘에서 불볕 바람 불어온다
몸속 진액을 말리며 온다
오라!
나를 살라 재가 될 사랑아
불멸의 몇 줄 잉태해야겠다.

- ‘세멜레의 창작’ 전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멜라는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의 딸이다. 세멜라는 제우스와 관계를 맺고 임신하지만, 헤라의 질투에 의해 제우스는 세멜레를 죽이게 된다. 제우스는 세멜라의 뱃속에서 태아를 꺼내 허벅지에서 키운다. 그 아이가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로 수액, 즙, 자연 속의 생명수를 상징한다. 시인은 “나를 살라 재가 될 사랑”으로 “불멸의 몇 줄 잉태”하기를 염원한다.

세멜라 이야기를 시로 쓰고 있는 시인은 평범한 “한 여인이 신을 낳았”음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애초에/ 여인은 신을 낳으려 이 초록별”(이하 ‘신을 낳는 여인들’)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은 “몸으로 오기 전에 꿈길로 먼저 찾아”온다. 신은 사랑하는 여인을 책임지지 않지만, 여인이 낳은 아이는 “천년 묵은 종자에도 싹을 틔우는 혈통”(‘연(蓮)’)인지라 신의 반열에 오른다.

평범한 여인인 시인은 “지상의 어린 해님들”(‘태양 양육법’)만큼은 신이 되기를 원한다. 신이라 했지만 사실 신처럼 오래 행복하게 무병장수했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신화는 신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말씀 아직 다 해독하지 못했다. 거기, 할머니”(‘청동 구름을 타고’), “우리 엄마는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요”(‘마야의 꽃들’), “그 여름 아버지 없는 아열대의 뒤뜰에서/ 어린것들은 어미 치맛자락 붙잡고 덩달아 울었다”(‘자귀나무가 서 있는 정원’)와 같은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꿈은 꿈이면서 곧 현실이다. 시 ‘세족’에서 보듯, 가장 성스럽고도 현실적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더럽다는 생각도 없이 “무좀 든 발가락 사이사이” 깨끗이 씻어 주는 그런 사랑이면서 “허무에 애 말리는 사랑”(‘그류’)이다. “지상의 마지막 부부”는 세족을 통해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진(眞)이다.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조명 지음. 민음사 펴냄. 112쪽/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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