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풀어주는 시험지"…23조 반도체 딜에 숨은 미중 신경전

"10%도 안 된다고 봅니다."


낸드플래시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미국 웨스턴디지털의 일본 키오시아 인수를 중국이 승인할 가능성에 대해 반도체업계 한 인사는 1일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의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연타를 허용한 중국이 순순히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확보 전략의 단추를 채워줄 리 없다는 얘기다.

그는 "이번 딜의 최종 성사 여부는 웨스턴디지털과 키오시아의 협상이 아니라 미국이 중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내놓을 카드에 달렸다고 해도 무방하다"며 "앞으로 반도체 M&A에 속도를 낼 우리 입장에서도 좋은 교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가 국가안보 차원의 문제로 부상하면서 반도체업계의 대규모 M&A(인수합병)가 각국의 견제 논리에 휘청이게 된 것은 3~4년 전부터다. 그 중에서도 중국이 가장 심하다. 퀄컴의 NXP 인수(2018년), 어플라이머트리얼즈의 고쿠사이일렉트릭 인수(2019년)가 모두 중국의 다분히 의도적인 심사 지연으로 최종 무산됐다.

중국은 최근 엔비디아의 ARM 인수를 두고도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승인을 미루고 있다. 웨스턴디지털과 키옥시아가 인수에 합의할 경우 최종 관문이 중국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중국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반도체업체간 M&A(인수합병)는 시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주요국 공정경쟁 감독당국의 승인을 거친다. 주로 미국, 중국, 한국, 일본, 영국 등 6~7개국에서 이뤄지는 심사에서 한 곳이라도 불허 판단이 나오면 거래가 틀어진다. 특히 세계 1위 반도체 소비국인 중국이 승인을 거부할 경우 중국시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거래 성사가 불가능하다.

업계에서는 웨스턴디지털의 키옥시아 인수 시도를 두고 올 상반기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굳어진 미국의 반도체 제조기지 확보 전략과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의 자국 내 투자 유치 정책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분석한다. 특히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반도체 전력화에 속도를 내는 미국의 이해가 이번 딜에 깊이 개입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굴기(일어섬) 견제에 호되게 당해온 중국이 이번 딜을 대할 태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장의 한 인사는 "중국은 과점체제로 재편된 시장에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D램과 달리 아직 플레이어가 많은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도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웨스턴디지털과 키옥시아의 협상은 200억달러(약 23조원) 수준으로 예상되는 인수가와 본사 소재지 등을 두고 막판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업계의 시선은 이미 양사의 협상 결과를 넘어서 미국이 중국에 제시할 카드를 향해 있다. 미국이 중국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딜을 추진하는 데는 비장의 카드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지난해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밀어붙인 반도체 공급 제재 일부 완화 등이 비공식 라인을 통해 논의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재용 부회장이 복귀한 삼성전자 (77,600원 ▼2,000 -2.51%)도 '3년 내 의미 있는 M&A'를 재확인하면서 미일의 중국 설득 카드에 촉각을 기울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의 입장은 중국에 내줄 게 많은 미국과는 다르다"면서도 "긍정적으로 보면 미국과 일본이 먼저 풀어주는 시험지라는 점에서 참고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