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힘을 빼니 더 빛나는 영원한 '심(心) 스틸러'

사진제공=넷플릭스

세계적인 스트리밍 플랫폼 넷플릭스가 내놓은 신작 ‘오징어 게임’ 속 배우 이정재는 능수능란하다. 여러 작품과 CF 속에서 보여주던 ‘꽃중년’ 특유의 댄디함은 땅 속 깊이 묻어놓은 듯하다. 노상에서 나물을 파는 노모에게 용돈을 구걸하고, 그것도 모자라 노모의 통장을 몰래 빼내 경마로 탕진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부터 나온다.


20대 이하 관객들에게는 이런 이정재의 모습이 낯설다. 하지만 30대 이상 관객들은 "어디서 본 건 같은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시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계를 22년 전으로 돌려보자. 이정재에게 첫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태양은 없다’(1999). 당시 이 영화에서 그는 허풍 가득한 흥신소 직원 홍기 역을 맞춤옷처럼 소화했다. 상대역은 영화 ‘비트’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정우성이었고 연출은 그를 페르소나처럼 아끼던 김성수 감독이 맡았다. 하지만 이정재가 더 빛났다.


‘태양은 없다’에서 "압구정동에 30억 짜리 빌딩을 갖는 게 목표"라면서도 번번이 헛발질만 하던 홍기가 철들지 않고 22년간 살아왔다면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의 모습이 아닐까? ‘태양은 없다’에서 홍기는 불량배인 병국에서 쫓기며 매를 맞는다. ‘오징어 게임’ 속 쌍문동 사는 성기훈 또한 사채업자들을 피해 다니기 바쁘다. 이런 연결이 가능한 것은, 이정재가 배우로서 자신의 서사를 잘 구축해왔다는 의미다.


이정재는 1993년 ‘공룡선생’으로 데뷔 후 지금껏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될 성 부른 신인이었고, 단박에 영화 ‘젊은 남자’, 드라마 ‘느낌’ 등의 주연 배우 자리를 꿰차고 승승장구했다. 2009년 드라마 ‘트리플’ 이후에는 주로 스크린에서 활약했다. 이 기간 그는 ‘스타’에서 ‘배우’로 또 한번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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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정재의 이력을 살펴보면, 독특한 점이 있다. 그가 출연 분량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작품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했다. 9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관상’의 수양대군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영화의 중반부에 첫 등장한다. 2시간 분량 영화에서 1시간 가량 출연하지만, 존재감 큼은 으뜸이다.


‘도둑들’의 뽀빠이, ‘암살’의 염석진 역할 역시 작품 속 일부라 볼 수 있다. 단독 주연으로서 극을 진두지휘하던 과거와는 다르다. 내로라하는 배우들 속에서 눈에 띄는 연기력을 바탕으로 그의 대사는 유행어로 이어지기도 했다.("김구 선생이 날 의심해?" "구멍이 2개지요?" 등의 대사는 요즘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되곤 한다.)


두 편으로 제작된 ‘신과 함께’에서는 어떠한가. 극 중 염라대왕을 연기한 그는 심지어 ‘특별출연’이었다. 당연히 출연 분량이 많지 않지만 존재감만큼은 아주 특별했다. 1편의 주인공이었던 차태현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이정재가) 특별 출연으로 촬영을 시작했다가 30회 이상 찍고 갔다"면서 "감독님이 ‘염라대왕을 해줬으면 좋겠다’해서 걸려들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일련의 작품 속 이정재가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가 포기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외모. 뽀빠이와 염석진 모두 각각 사기꾼, 변절자지만 외모 만큼은 스타일리시했다. 치렁치렁한 머리결이 인상적이던 염라 역시 이정재이기에 가능한 임팩트를 줬다.


그렇기에 ‘오징어 게임’ 속 이정재의 변신은 더욱 반갑다. 이 작품 속 성기훈은 온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거의 없다. 멍투성이, 상처투성이다. 노모 뿐만 아니라 시장통의 친구 어머니까지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또 어디서 싸웠냐?"고 혀를 끌끌 찬다. 상처 없는 얼굴 역시 푸석푸석하기는 매한가지다. 그 흔한 분칠 한번 하지 않았을 것 같은 까칠한 낯빛으로 인생 막장에 선 성기훈의 모습을 웅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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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그는 ‘오징어 게임’의 제작발표회에서 "이미지 변신이라고까지 하기는 민망하다"면서 "다만 완성된 작품을 제가 쭉 보면서도 한참을 웃었다. 제가 이렇게나 웃길 수 있나 싶었고 ‘뇌가 없는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기훈 캐릭터에서 벗어나려고 한동안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속 기훈은 ‘태양은 없다’의 홍기와 분명 다르다. 50대 안팎의 나이에 이혼한 아내가 키우는 딸에 대한 마음이 절절한 기훈에게는 ‘절박함’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태양은 없다’의 홍기가 얄밉지만 내칠 수 없는 청춘이었다면,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은 한 번쯤은 아들답게, 아빠답게 살아보라고 응원하게 만드는 중년이다.


‘오징어 게임’ 속 이정재의 연기력은 1번 도전자 오일남(오영수 분)과 함께 할 때 배가된다. 456억 원이라는 상금을 쟁취하는 것을 넘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강한 상대를 파트너로 맞아야 하는 순간, 성기훈은 오일남에게 손을 내민다. 이를 마음 먹기까지는 고민이 많았지만, 일단 결심 후 악수를 청하는 성기훈의 얼굴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믿음이 가득하다.


그런 성기훈이 구슬게임을 하며 오일남을 속이는 장면에서 짓는 비굴하고 미안한 표정 연기 또한 일품이다. 치매로 인해 기억이 나지 않는 척 연기하는 오일남에게서 조금씩 구슬을 빼앗는 기훈. 마지막에 오일남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마지막 남은 구슬 1개를 넘겨줄 때 성기훈이 짓는 표정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오일남에 대한 미안함, 인간다움을 잃었던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부끄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기에 오일남이 건네는 구슬을 받고 뒤돌아 설 수밖에 없는 비참함이 한데 섞여 구겨지는 얼굴은 이정재의 연기 인생 30년을 응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정재가 성기훈에 대해 "상당히 낙천적인 인물인데 아픈 부모님을 모시고 수입도 변변치 않고 암울하다. 그러다 보니 게임에 참여한 동기도 있고, 그 와중에 새로 사귄 사람들과 낙천적인 성격으로 친하게 지내고 게임을 함께하며 목숨을 걸기도 하는 캐릭터"라면서 "지금껏 경험해보지 않았던 캐릭터"라고 말한 이유다. 그리고 이정재는 이런 한 줄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이상의 연기를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