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영업기밀 내놓으라"는 美…정부 "업계와 공동 대책 마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미국 백악관과 상무부가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재고와 주문, 판매정보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한 사실이 알려지며 한국 정부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정부는 우선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 미 행정부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한 뒤 반도체 업계와 공동으로 대책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27일 "미 행정부가 경영관련 자료를 내놓으라고 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며 "이후 기업들이 대응방향을 정하고 정부와 업계가 만나 함께 종합적인 대책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관련 내용이 전해진지) 얼마되지 않아 스터디(내용 파악)를 하고 있는 상황으로 해당 작업이 마무리되면 업계와 만나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23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은 브라이언 디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 주재로 반도체 업계 화상회의를 열고 업계의 자발적 정보공개를 요구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45일 안에 재고, 주문, 판매 관련 사실을 묻는 질문지에 답해달라는 것이다.

반도체 업체들은 난감한 입장이다. 반도체 전반에 대한 재고와 주문, 판매정보가 공개되면 기업의 경영전략이 노출될 수 있어서다. 특히 재고정보는 반도체 가격을 단기적으로 크게 출렁거리게 만들 수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과점체제인 상황에서 재고가 공개되면 반도체 가격을 예측할 수 있어 기업들이 곤란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며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은 정확한 생산·재고량을 공개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문제는 전세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부족 문제에 대응하겠다는 미 행정부의 요구를 전면 거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국방물자생산법(DPA)을 근거로 정보제출을 강제할 수 있다는 엄포를 놓은 상황이고, 앞으로 계속될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우선 미 행정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백악관의 의도가 차량용 반도체 수급상황을 파악하는데 국한된다면 해당 반도체 생산비중이 낮은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 전문연구원은 "(차량용 반도체에 한정되는 경우에는) 타격이 크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전자, 인텔보다는 고객이 다양한 TSMC가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 반도체 기업의 주력상품인 메모리반도체 등과 관련된 내용을 포괄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경우는 정부의 대응 수위를 높여야 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법·제도를 근거로 한 대응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 영업비밀보호법(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은 협박 등 부정한 수단으로 영업비밀을 취득하는 것을 영업비밀 침해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영업비밀 보유자는 영업비밀 침해행위로 영업상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는 경우 법원에 그 행위의 금지 또는 예방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도체 기업이 최대 거래 및 생산 국가 가운데 하나인 미국의 연방정부를 상대로 이를 적용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