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전 "마누라·자식 빼고" 그날…이재용 "목숨 걸고" 유럽행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1년 11월14일 오전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오문영 기자 /사진=오문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유럽 출장길에 오른다. 현지 사업 점검과 함께 대형 M&A(인수합병)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출장을 떠나는 날이 공교롭게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자"며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의 그 날이다.

삼성전자 소식통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이날부터 오는 18일 귀국할 때까지 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 각국을 방문해 반도체를 중심으로 유럽의 파트너사들과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이 부회장의 출장 목적지는 지난 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물산 합병 의혹 공판에서 재판부가 향후 두 차례 공판을 이 부회장 불출석 상태로 진행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라는 점이 공개됐다.


이 부회장이 가석방 상태로 해외 방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기회에 독일과 영국 등에 본사를 둔 파트너사도 두루 찾을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부회장이 네덜란드를 먼저 찾는 배경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도체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ASML이 있다. 이 부회장은 2020년 10월에도 네덜란드 ASML 본사를 직접 찾아 EUV 장비 공급 등을 논의했다. 삼성전자가 제2의 성장동력으로 낙점한 파운드리(반도체 노광장비) 부문에서 시장점유율 1위(56%)인 대만 TSMC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EUV 장비 확보가 선결과제다.


EUV 장비는 연간 생산량이 수요에 비해 적다 보니 반도체 제조사 한 곳이 한 대를 가져오면 경쟁사가 이를 빼앗기는 제로섬 구조다. ASML이 1년에 생산하는 EUV 노광장비는 40여대 수준이다. ASML은 올 2월 발표한 2021년 연간 실적 보고서에서 2020년 31대, 2021년 42대의 EUV 장비를 고객사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올해는 50여대를 생산할 예정이지만 노광장비 제작에 들어가는 반도체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생산이 다소 지연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2016년 미국 자동차 전장(전자장비)업체 하만 인수 이후 6년 가까이 끊긴 대형 M&A 추진 여부도 이번 출장을 바라보는 업계의 관심사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M&A를 다각도로 검토했지만 국정농단 사건 수사와 재판으로 2017년부터 이 부회장의 경영이 제한되면서 이렇다할 M&A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이번 출장을 두고 네덜란드의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 NXP, 독일의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 인피니온, 영국의 반도체 설계업체 ARM 등을 대상으로 한 M&A 논의가 진행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NXP와 인피니온은 글로벌 시장의 차량용 반도체 품귀 사태가 불거지기 전부터 삼성전자의 M&A 대상 물망에 올랐던 기업이다.

ARM의 경우 이미 글로벌 M&A 매물로 나온 상태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적지 않다. 지난달 30일 삼성 서초사옥에서 이뤄진 이 부회장과 팻 갤싱어 인텔 CEO(최고경영자)의 깜짬 회동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올초 미국·영국·EU 규제당국의 상호 견제로 미국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무산됐던 만큼 삼성전자가 ARM 인수를 추진한다면 인텔 등 글로벌 유력 반도체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 작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2020년 8월 엔비디아의 ARM 인수 계약 체결 당시 인수가격이 400억달러(약 47조원)에 달했고 최근에는 인수가격이 더 올랐다는 점에서도 단독 인수는 쉽지 않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은 현재 ARM 대주주인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면서 그동안 여러차례 만나 사업 협력을 논의해온 관계이기도 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소프트뱅크는 ARM 지분 매각과 상장 등 방식으로 다급하게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고 삼성전자는 자체 개발한 엑시노스 프로세서에 ARM의 반도체 설계기반 및 라이선스를 활용하고 있어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며 "최근 세계 각국의 상호 견제로 반도체 M&A가 쉽지 않아진 점을 감안하면 컨소시엄 형태의 인수나 대규모 지분 투자 등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고려하면 이 부회장이 이번 출장에서 예상치 못한 곳을 방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이 부회장은 2020년 유럽 출장 당시에도 김포공항 귀국현장에서 취재진을 만나 스위스를 다녀왔다고 깜짝 공개했다. 구체적으로 방문한 곳은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 도쿄 하계올림픽 연기와 맞물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들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출장에서는 지멘스 등 파트너사가 있는 독일도 방문지로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해외 행보를 두고 지난달 450조원 규모의 5년 투자계획 발표 이후 다시 글로벌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계 한 인사는 "이 부회장이 지난달 25일 대통령실 행사에서 대규모 투자계획을 놓고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고 밝힌 만큼 이번 출장에서 좀더 구체적인 경영 구상이 드러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