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코로나 파이터', 아직 안끝났다…앤서니 파우치는 누구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

'차르'(짜르)는 러시아어로 황제를 말한다. 최근 영어권에선 특정 분야의 최고 책임자도 뜻한다. 미 국무부 아시아 담당 차관을 '아시아 차르'라 부르는 식이다.

'코로나 차르' '백신 차르'가 있다면 누굴까. 앤서니 파우치 박사(82)다.


그는 미 국립보건원(NIH) 산하의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으로 미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응 핵심에 서 왔다. 미 언론에 워낙 자주 등장해 국내에도 익숙하다. 정은경 전 질병관리청장이 "한국의 파우치"로, 반대로 파우치 소장은 "미국의 정은경"에 비유되곤 했다.

그런 그가 최근 뉴욕타임스(NYT) 인터뷰 등을 통해 "올해 말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39년째 맡고있는 NIAID 소장뿐 아니라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 의학담당 수석보좌관 직책도 내려놓는다. 코로나 대응의 상징적 인물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접는 셈이다.

"한국에 정은경, 미국에 파우치"

파우치 소장의 1984년 모습/사진= 미 NIAID

대개 의학자나 과학자로서 고위공직을 맡으면 연구자 본연의 역할보다는 행정가나 관리자로 변신하곤 한다. 파우치 소장은 둘 다 잘했다. 전공인 전염병과 면역학 관련 연구성과도 탁월한 데다, 행정가로도 뛰어났다.


그는 초인적인 워커홀릭(일 중독)이다. 지금도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NIAID 사무실에 오전 7시 이전에 출근하고, 잠들기 전까지 하루에 12~16시간 일한다. 회의하고, 이메일에 답하고, 인터뷰하고…. 비상 시기, 역할이 많고 책임이 크긴 하다. 그래도 '쉬지않고 주 7일' 근무는 요즘 시각으론 과도해 보인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런 기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194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파우치(Fauci)라는 이름에서 보듯 이탈리아계 이민 후손이다. 아버지는 약국을 했고 그의 어머니와 누나들도 약국 일을 도왔다. 파우치 본인도 처방전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환경에서 고교시절부터 의대 진학을 꿈꿨다. 1966년 코넬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땄다. 대학 수련의 과정을 마친 후 1968년 NIAID에 발을 들였다. 그는 탁월한 연구력으로 이곳 임상연구소의 생리학연구실장(1974), 면역학연구실장(1980) 등을 거쳐 1984년 NIAID 소장에 지명된다.

그후 39년째 연구소장이다. 자신이 보좌하고 조언한 미국 대통령만 로널드 레이건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7명이다. 무슨 '빽'이 있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답은 단순하고 평범하다.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고 그 자신도 공직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데 충실했기 때문이다.

39년째 연구소장, 에이즈·에볼라·SARS도 다뤄

2020년 12월, 미 국립보건원(NIH)의 코로나 백신 공개접종 때 모더나 백신을 맞는 파우치 소장/사진= NIH

그는 젊은 의학자 시절 각종 인체 질환과 면역반응 조절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다발성 동맥염 결절, 다발성 혈관염 등의 치료법을 연구했다. 1985년 미국 류마티스 학회 회원들은 이 연구를 당시 기준으로 20년간 류마티스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았다.

특정 암에 약물을 쓰는 방법을 개선, 치사율을 극적으로 낮췄다. 그러나 대중에겐 생소한 일이었다. 그가 의학계 주요 인물로 부상한 건 '면역체계'에서 '전염병'으로 연구 분야를 조금 틀었기 때문. 특히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 즉 HIV 바이러스를 빼놓을 수 없다.

NYT, 워싱턴포스트(WP) 등을 종합하면 그는 1980년대 미국 내 AIDS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때부터 경각심을 높이고 치료법을 찾던 초기 연구자 중 하나다. HIV의 특성에 대해 오판했다는 지적도 일부 있지만, 바이러스 규명과 치료법 연구에 공로가 크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게다가 미 의회를 끈질기게 설득해 에이즈 대응예산을 확보하는 데 일조했다. 그 자신도 2020년 인터뷰에서 "HIV가 내 경력과 정체성을 결정했다"고 돌이켰다. 파우치는 그 뿐 아니라 조류독감 사스(SARS), 에볼라 바이러스, 신종플루, 메르스(MERS)에 이르기까지 여러 감염병을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과학논문인용색인(SCI)은 국내에도 논문 수준 평가에 자주 등장한다. 이 색인을 제공하는 과학정보기구(ISI) 측은 1983~2002년 사이 전세계 과학분야 저널에 논문을 실은 저자가 약 300만명이며 파우치는 그중 13번째로 많이 인용된(피인용) 학자라고 밝혔다.

코로나19 대응 최전선…트럼프와 갈등

2020년 4월, 백악관에서 트럼프 당시 대통령(왼쪽), 마이크 펜스 부통령(오른쪽)과 브리핑하는 파우치 소장 /사진= 미 백악관

행정가 즉 보건정책 전문가로도 그의 역할은 컸다. 레이건 대통령부터 7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NIAID 소장으로 일했는데 의학적 발견,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방역정책에 조언했다. 과학적 근거를 보건정책으로 연결시키고 정치인과 관료를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에도 뛰어났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지자 그는 또 한 번 진가를 발휘한다. 파우치는 트럼프정부 백악관의 코로나 태스크포스(TF)에 포함돼 사실상 전문가그룹을 대표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코로나를 대수롭지않게 여기고, 마스크나 거리두기 등에 질색했는데 이 때문에 파우치 소장과 수차례 충돌했던 건 잘 알려져 있다.

2020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백악관 기자실에서 코로나 관련 음모론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자 파우치 소장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모습은 트럼프시대 코로나 대응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트럼프 대통령에 비판적이던 배우 브래드 피트는 새터데이나잇라이브(SNL)에서 직접 파우치로 분장해 이 상황을 패러디했다.

파우치 소장은 정치적 갈등을 이유로 물러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던 CNN에 수시로 나와 미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으라"고 호소했다.

트럼프 지지자들과 보수적 국민들 사이에선 시쳇말로 '설쳐대는' 공무원으로 찍혔다. 반대로 바이든 당시 대선후보를 보함한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선 파우치를 영웅으로 봤다. 2020년 대선에서 승리한 바이든 대통령은 파우치를 의학분야 수석보좌관(Chief Medical Advisor)에 임명했다.

정권 바뀌어도 인정…공적 역할 충실

(워싱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이 29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코로나19 신종 변이 오미크론이 이미 미국에 유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C) AFP=뉴스1

파우치 소장은 이처럼 민주당과 가까워 보이지만, 한 쪽 정당에 치우친 성향은 아니다. 역대 대통령 중엔 레이건이나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등 공화당 출신 대통령과 오히려 호흡이 잘 맞았다.

파우치는 부시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에 에이즈 백신을 보급하는 '대통령긴급계획'(PEPFAR)을 승인했던 걸 높이 평가했다. 그는 민주당에도 공화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소속 유권자라고 한다. 모든 게 정치적 논란을 최소화하면서 일에 집중하려는 선택 아니었을까.

NIAID 소장은 그의 경력과 영향력에 비하면 낮은 직책일 수 있다. 파우치는 아예 NIH 국장을 맡아 달라고 수차례, 여러 정권에서 호출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6월 워싱턴DC 자택에서 WP와 인터뷰하며 "NIH로 간다면 국장으로서 일이 너무 많고, 행정업무 때문에 연구와 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NIAID 소장 급여는 1년에 48만달러(6억원 이상)다. 의회에선 미 공직자 가운데 최고 연봉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정도의 전문가라면 대개 민간영역에서 훨씬 많은 돈을 번다고 WP는 분석했다. 끝까지 공직에 남았기 때문에 그가 '최고연봉자'가 됐다는 것이다.

파우치는 이처럼 한 자리를 40년 가까이 우직하게 지켜왔다. 정치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공공보건을 증진시키고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그의 한 동료는 "토니(앤서니의 애칭)는 돈이나 욕망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도 시사점을 준다.

사퇴일 뿐 은퇴 아냐..아직도 정정한 80대

(워싱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연구소 소장이 11일(현지시간) 워싱턴 의사당의 상원 보건·교육·노동 연금위원회 청문회에 로셸 왈렌스키 CDC 국장과 참석을 하고 있다. (C) AFP=뉴스1

그는 HIV 환자를 치료할 때 NIH의 간호사이던 크리스틴 그래디와 만나 1985년 결혼했다. 아내는 현재 생명윤리학자(bioethicist)로 NIH에서 일한다. 부부는 딸만 셋을 뒀다.

파우치 소장은 지난 6월15일 코로나에 확진됐다고 공개했다. 자신이 국민들에게 권했던 대로 백신을 부스터샷까지 맞은 상태였고 증상은 가벼웠다고.

파우치 소장은 WP 인터뷰 때 "밤 9시에 진짜 맥주 한 잔 하고 자고싶을 때에도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일중독자의 면모는 지난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파우치'에 잘 소개됐다.

그의 사퇴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 화제다. 흥미로운 건 "은퇴"가 아니란 점이다. 파우치는 또다른 기회를 위해 공직을 떠날 뿐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건강하고 열정과 에너지도 넘친다면서. 팔순을 넘긴 '코로나 차르'에겐 아직 정복해야 할 미지의 질병이 많은 모양이다.

(워싱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최고 의료 고문인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장이 1일 (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브래디 룸에서 젠 사키 대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미크론 변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C) AFP=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