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도 손편지 없네요"…빨간 우체통도, 43년 된 우체국도 '추억 속으로'

집배원 박병원씨(49)가 23일 오전 11시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우체통을 열어 우편물을 수거하는 모습. 과거 우체통 하나에서 500통까지 나왔던 우편물은 이날 20통 남짓이었다. /사진=김미루 기자

집배원 박병원씨(49)는 오전 9시쯤부터 서울 강남구의 빨간 우체통 27개를 털었다. 털었다는 말은 집배원들의 직업어로 우편물을 수거했다는 뜻이다.

박씨가 집배원으로 일한 기간은 15년. 직업어가 입에 붙는 세월 동안 박씨가 바닥에서 뽑아 철거한 우체통은 70여개. 하루 2회 수거는 1회로 줄었다. 한번 털면 500통은 거뜬히 나오던 우편물은 이날 19통에 그쳤다. 그 사이 수집 부서는 폐쇄됐다. 동료 20여명과 함께 털던 강남 지역 우체통은 박씨가 모두 맡게 됐다.


과거 숱했던 군대 간 남자친구에 보내는 연애편지·스승의날 손편지는 요즘 하루 한 통 보기도 어렵다. 박씨는 "손편지가 사라지는 게 아쉽다"면서도 "수거하는 게 일인 저희한테는 일 부담이 줄어 좋은 면도 있다"고 말했다.

우체국 우편물 수요가 급감하면서 우체통과 우체국이 줄어들고 있다. 적자 운영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우정사업본부(우본)의 입장과 공적 기능을 위해 유지해야 한다는 일부 시민들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우편 물량 반토막에 우체통 절반 넘게 사라져…우체국은 폐국

(서울=뉴스1) 임세영 기자 = 추석 명절을 앞둔 1일 오전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물류센터에서 집배원 등 직원들이 택배를 분류하고 있다. 올 추석 명절 소포우편물은 약 1,917만개가 접수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22.9.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우편 물량은 10년 전에 비해 절반 가까이 급감했다. 24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한 해 발송되는 일반우편 물량은 2010년 44억통에 달했지만 2021년 23억5333만통으로 46.5% 감소했다.

우본은 우체통을 철거하고 있다. 3개월 동안 우편물이 10통도 나오지 않는 우체통이 있다. 우본 통계에 따르면 2012년 1만9428개였던 우체통은 지난해 9114개로 절반 넘게 감소했다.


우체국도 사라지고 있다. 우체국과 우편취급국을 포함하는 6급 이하 우체국 수는 2012년 1723곳에서 2021년 1454곳으로 15% 줄었다. 지난 6일에는 1980년 9월 개국한 서울 강남구 서울현대아파트우체국이 폐국했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오래된 우체국에 속한다.

우본은 적자 운영 타개를 위해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12월 서울지방우정청장은 "이메일·전자고지서 등 정보통신 발달로 우편물이 지속 감소했다"며 "우편사업 경영수지 적자가 확대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2020년 4월 공개한 '우정사업본부의 우편사업 경영 현황과 향후 과제' 자료에 따르면 우본의 우편사업으로 인한 적자는 2019년 한 해에만 1115억원이다.
"공적 기능하는 우체국 지키자" 반대 여론도

대전공무원노조연합 구성원들이 20202년 2월 12일 오전 대전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체국 폐국 반대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스1

그러나 공적 기능을 하는 우체국을 함부로 폐국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여성 김모씨는 "우체국은 2020년 코로나19(COVID-19) 공적 마스크 공급처로 활용됐다. 지난해에는 전국 우체국 집배원이 코로나19 확진자에게 재택치료키트를 배송했다"며 "(우체국이) 공적 역할을 하는 복지기관의 성격을 띠는 만큼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우체국의 공공성은 국회입법조사처에서도 언급됐다. 입법조사처는 지난 2020년 4월 7일 발행한 '우정사업본부의 우편사업 경영 현황과 향후 과제'에서 "시장 논리에 기반한 우체국의 감축은 국가 위급상황 상황 시 전국적인 물류망을 갖춘 우체국의 공적인 기능 수행 능력을 약화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고 밝혔다.

입법조사처는 그 사례로 코로나19 마스크 공급과 2018년 라돈 매트리스 수거를 제시했다. 우체국은 2018년 방사성 물질 라돈이 검출된 침대 매트리스를 일제히 수거했다. 또 올해 1월부터 우본·환경부가 협약해 폐의약품을 우체통에 회수하도록 하고 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도시 중심적 사고로 보면 우체국이 이미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통신·물류망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며 "자본 논리에만 따르면 소외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통신·물류망으로 재탄생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