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공화국 됐다"…스위스 '세계의 금고' 명성에 생긴 금

취리히 크레디트스위스(CS) 헤드쿼터 앞에 CS와 유비에스(UBS) 로고가 빌딩 위에 보인다. /사진=로이터

수십 년간 투자자들의 안식처로 여겨졌던 스위스가 크레디트스위스(CS)의 붕괴로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이란 오명까지 쓰게 됐다. 바나나 공화국이란 겉은 번드르르한데 속은 썩기 쉬운 바나나의 성질에 빗대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부패한 작은 나라를 가리킨다.

스위스 정부가 UBS의 CS 인수를 중개하는 과정에서 개방경제 시장의 두 가지 핵심요소인 독과점 규제와 주주권리를 무력화 하는 긴급 입법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다. 무엇보다 주주보다 채권자를 우선하는 자본시장의 기본 원칙을 깨고 170억달러(약 22조5000억원) 상당의 AT1(Additional Tier 1) 채권을 전액 상각하기로 하면서 줄소송이 예고된다.
스위스 정부의 CS 위기 대응, "원칙은 어디에…" 21일 블룸버그의 보도에 따르면, 법률 전문가들은 스위스 정부의 CS 매각 과정이 스위스 은행법상의 우선권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며 추후 외국인 투자자들이 스위스 투자를 기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베른대학 경제법 전문교수 피터 쿤츠는 "외국인 투자자들은 스위스가 법치가 적용되지 않는 '바나나 공화국'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취리히대학의 법학 및 금융학 교수인 컨 알렉산더도 스위스 정부의 이번 CS 위기 대응이 "법치를 훼손하고 스위스를 약화시키는 패닉에 빠진 방식으로 수행됐다"고 밝혔다.

스위스 정부는 지난 19일(현지시간) 저녁 CS 매각을 발표하면서 "공공질서 또는 내부 또는 외부 안보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현존하거나 임박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임시 법령을 발령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을 인용했다. 주주 투표에 관한 합병법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됐다.

스위스 취리히 크레디트스위스(CS) 헤드쿼터 앞에서 사람들이 UBS의 CS 인수를 반대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은행 독과점 이슈도 불거질 수 있다. 이날 저녁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스위스 1, 2위 은행의 합병 추진 과정에서 은행업계의 독점 우려를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말린 암스타드 금융시장감독청장은 "금융 안정성이 경쟁 우려보다 우선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규제법은 금융 안정성을 위해 경쟁 상황을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고 이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UBS의 투자자 프레젠테이션에 따르면, CS와 UBS가 합쳐지면 3330억 스위스프랑(약 469조원)의 고객 예금을 보유하게 된다. 이는 스위스 3위 은행인 라이파이센보다 1150억 스위스프랑 더 많은 금액이다.
CS·UBS 발행한 AT1에만 '전액 상각' 약관, 소송 이어질듯무엇보다 투자자들의 거센 반발을 야기한 대목은 스위스 은행 규제 기관인 스위스 금융시장감독청이 CS가 발행한 AT1 채권을 전액 상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AT1 채권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납세자가 아닌 투자자가 손실을 부담하도록 하기 위해 도입된 채권으로 위기 상황에서 자본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한다. 유럽과 영국 대부분의 다른 은행에서는 AT1 같은 유형의 부채에 보다 많은 보호장치를 두고 있다.

오직 CS 및 그의 경쟁사였던 UBS가 발행한 AT1 채권에만 약관에 자본으로 전환하지 않고 채권의 전액 소멸을 허용하는 문구가 있다. 투자자가 AT1 채권 매입 당시 해당 약관의 위험성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들 스위스은행이 발행한 AT1 채권만의 예외성은 채권자가 주주보다 우선인 일반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 20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명동점 딜링룸에서 직원이 UBS의 크레디트스위스(CS) 인수 관련 뉴스를 살피고 있다. 스위스 최대 금융기관 UBS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여파로 위기에 빠진 세계적 투자은행 CS를 32억 달러에 인수했다. 2023.3.20/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제이콥 키르케고르는 블룸버그에 "이번 사건으로 인해 많은 소송이 제기될 것이며 이는 스위스 당국의 불규칙하고 이기적 행동을 부각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총 190만명의 스위스 자산 투자자를 둔 246개의 연기금 펀드가 멤버로 있는 에토스 재단도 스위스 정부가 UBS의 CS 합병 전 주주투표를 막는 것에 공식 항변한다. 이 재단은 성명을 통해 "스위스 금융 중심지 역사상 전례 없는 실패에 직면한 가운데 에토스는 스위스 연기금을 시작으로 소액주주 이익을 계속 보호할 것"이라며 "법적 조치를 포함해 모든 옵션을 며칠 내 검토하겠다"고 했다.

한편 미국 로펌 퀸 에마누엘 어쿼트 앤 설리번은 21일 취리히, 뉴욕, 런던에 있는 사무소 대표들과 함께 채권자들이 고려해야 할 잠재적 구제 수단을 논의하기 위해 채권자들을 위한 컨퍼런스 콜을 연다고 밝혔다. CS가 발행한 170억달러 규모의 AT1 상각은 유럽 AT1 시장에서 사상 최대 손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