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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광장]사랑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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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4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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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장례식이라는 죽음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복잡다단한 인간사와 따뜻한 휴머니즘을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고아리가 아버지 고상욱의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다양한 문상객을 맞으며 그들의 증언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를 새롭게 알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죽음이 해방일 수 있는 것은 '나'의 한평생 경험과 관념 속에서 엉터리 사회주의자이자 가족에게 무심하고 권위적인 가부장 아버지가 당신에 대한 타인들의 다채로운 기억과 함께 새로운 아버지로 재구성,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딸은 아버지와 평생 불화했다. 빨치산 출신 아버지로 인해 그 자신은 물론 가족과 사촌들이 연좌제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고모들에게는 아는 것 많고 자랑스러운 오빠고 영자에게는 액취증 수술을 시켜줘 시집가게 한 은인이며 박 선생과는 서로 이념이 다르지만 막역지우, 경희에게는 소수 종교를 존중해준 어른이었다. 노란머리로 염색하고 학교를 뛰쳐나온 오거리슈퍼 다문화가정 손녀에겐 맞담배를 피워주는 친구이기도 했다. 실비집 노파에게 추파를 던지며 소주 한 컵을 3초에 마신 '3초 영감' 아버지는 창피하지만 망자에겐 다들 너그럽기 마련이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내가 모르는 아버지와 엄마가 너무 많다. 함께 간 백반집에서 아버지를 생각해 우렁된장을 시키려는데 아버지가 부대찌개를 가리켰다. 햄과 소시지 같은 걸 드시는 줄 몰랐다. 내 근엄한 아버지도 당신 친우들 사이에선 어린애 입맛을 지닌 장난꾸러기 캐릭터가 아닐까. 엄마 모시고 펜션에 놀러 가선 속은 잘 안 익고 연기만 나는 숯불 바비큐 대신 팬에다 삼겹살 구워 먹자 하는데 엄마는 숯불로 굽자며 고집을 부렸다. 집에서 신문지 깔고 프라이팬에 냉동삼겹살 구워 먹는 것만 해봤지 좋은 데 놀러 가서 바비큐는 안 먹어본 것이다. 어쩌다 보게 된 카카오스토리 속 그녀는 억척스러운 세월을 살아온 엄마가 아니라 귀엽고 엉뚱한 소녀였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관계의 상대성을 생각하는 한편 기억의 순간성과 그 순간의 영속성에 대해 골똘해졌다. 고아리가 아버지를 미워한 것은 생의 중요한 장면마다 미운 짓 하는 아버지가 우표처럼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면모도 물론 있었겠지만 나쁜 기억이 그걸 덮는다. 그러나 나쁜 기억이 항상 압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다 보면 한 조각 좋은 기억이 상수리나무에서 툭 떨어진 도토리처럼 문득 머리를 두드리는 때가 있다. 미움과 원망의 대상인 아버지는 문상객들의 기억 속에선 따뜻하고 정 많고 의리 있는 인간 고상욱이었고 장례식에 모여드는 호의적인 증언들은 망자에 대해 잊었던 호감과 연민을 딸에게 되살려준다.

그토록 무뚝뚝한 아버지, 가족과 불화하고 고통을 안겨준 아버지지만 나 어릴 적 어느 겨울밤 술에 취해선 내복 차림의 나와 동생을 안고 "아빠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하신 그 한순간 장면으로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시간은 연속적인 것 같아도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다. 하나의 흐름, 하나의 동일선 같아 보여도 사실은 구간별로 나뉜 부분적 세계다. 유년기가 다르고 사춘기가 다르며 장년기가 다 다르다. 한 시절은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며 다른 어떤 시절도 끼어들 수 없다. 10대는 10대로 완전하다. 끝나는 순간 10대는 죽는다. 20대도 30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시절을 살고 한 시절을 죽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잘 아는가. 그가 죽은 후 문상객들에게 듣고서야 비로소 알 것인가. 있을 때 잘하자는 말은 왜 없어지고 나서 사무치나. 나와 너는 서로에게 한 사람이자 여러 순간으로 나뉜 여러 사람이다. 한순간 얼굴로 평생을 기억한다면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순간마다 어떤 표정,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 순간을 살자. 순간을 사랑하자. 미운 기억에 갇혀 있는 사랑을 해방하자. 사랑만 하기에도 모자란 생이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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