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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이건 네가 아무리 우겨도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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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11.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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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석민재 시인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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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와사상’,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석민재(1975~ ) 시인의 첫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는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부정과 금기에 도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던지는 시인의 질문은 심각하기보다 발랄 경쾌하다. 하지만 활짝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피에로’의 눈물을 감지하는 순간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엄마는 언니 낳은 걸 잊어버리고 나를 또 낳았다”(‘내 이름에 침을 뱉었다’), “어쩌다 생긴 애”(이하 ‘양귀비를 보다’)라는 진술을 감안할 때,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자존감은 사라지고 없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언니의 ‘위조품’으로 살아야 하는 비극, ‘사기’나 ‘조작극’ 같은 삶에 대한 반항으로 시인은 “호주머니에 넣어 온” 수면제를 만지작거리거나 총을 겨눈다.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 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빅풋’ 전문


먼저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빅풋’을 살펴보자. 사스콰치(Sasquatch)라고도 불리는 빅풋은 미국·캐나다의 로키산맥 일대에서 목격된다는 신비로운 유인원이다. 빅풋은 좁게는 “군함처럼 큰” 아버지의 발이지만 넓게는 “말기 암, 엄마”를 돌보는 아버지의 위대한 행보를 뜻한다. 오랜 엄마의 암 투병으로 집은 오두막으로 쪼그라들었다. 시인은 오두막집의 대칭으로 군함을 의도적으로 등장시킨다. 부모의 선택에 따라 가족은 언제든지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상황은 위급한데 시의 보폭은 경쾌하다. 아버지는 운동회 때 2인3각이나 공굴리기 혹은 춤을 추는 것 같고, 엄마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전래동화 속의 호랑이 같다. “절벽 끝에서” “죽음을 데리고 노는” 부모의 모습에서 죽음을 초월한 사랑과 해학이 동시에 느껴진다. 특히 아픈 엄마가 병간호에 지친 아빠를 놀리는 “죽을까 말까 죽어 줄까 말까”는 이 시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기가 된 듯한 엄마를 바라보는 아슬아슬한 가족의 심정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이건 빨강 네가 아무리 우겨도 빨강

파랑 같아도 이건 빨강

노랑 같아도 이건 빨강

오렌지 같아도 바나나 같아도 이건 빨강

지금 이게 빨강이라고요?

네 얼굴이 아무리 붉으락푸르락 해도 이건 빨강

나는 빨강이 싫어요! 그래도 너는 빨강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그래도 너는 빨강

노랗게 생리통이 와도

청바지에 검은색으로 슬쩍 비쳐도

나는 여자가 싫어요!

그래도 너는 빨강

이건 빨강, 정말 빨강!

- ‘계통’ 전문


계통이란 사람 및 가축에서 어떤 개체보다 이전의 혈연적 연속성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나보다는 가계(家系)가 우선이다. 내가 아무리 같은 혈통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이 시는 “이건 빨강”이라 규정하면서 시작된다. 빨강이 아니라고 “아무리 우겨도” 결국 빨강이고, 그다음부터는 진실게임이다. 한번 부정당한 진실은 파랑이나 노랑과 같은 색상은 물론 오렌지나 바나나 같은 사물도 빨강으로 굳어진다. 그건 빨강이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믿어주질 않는다. “나는 빨강이 싫어요”는 나는 내 핏줄이 싫어요의 다른 표현이다. 핏줄에 대한 부정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서 이 시는 급격하게 방향을 튼다. 핏줄에서 반공이데올로기로, 여성성으로 전환된다. ‘빨갱이’라는 낙인과 여성으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차별을 슬쩍 건드리고 있는 것.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아도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구나’ 짐작하게 한다. 빨강이라는 말의 반복을 통해 태생과 여성성, 이념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빼어난 솜씨로 형상화하고 있다.

비는 왼손잡이입니다

왼손잡이 자살하는 법, 매뉴얼을 보면서
방아쇠는 왼쪽 엄지발가락에 걸고

랄, 랄, 랄 눈 대신 비만 오는데
비 맞은 산타클로스는 어디로 갔을까

비는 흰색입니다

저기 젖은 흰색 봉투는 버려진 곰이거나
총 맞은 쓰레기봉투거나

타지 않는 쓰레기로 하얗게 분리된 내가
푹푹 썩어 가는 중입니다

비는 비틀거리지 않습니다

한 병은 모자라고
두 병은 남고

- ‘비의 기분’ 전문


이번 시집에선 비가 자주 등장한다. 시 ‘비는 구두를 신고 온다’에서 비는 “복사뼈 하얀 일흔네 살”의 엄마다. 구두를 신고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엄마는 방문 앞에 서서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밤새 서 있”다. 엄마는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자책하며 운다. 허기에 지친 자식들은 자는 척 엄마의 오열을 듣고 있다. 반복되는 “비는 힘이 세다”는 당연히 역설이다.

시 ‘비의 기분’에서 “비는 왼손잡이”다. 기도하는 두 손이 인간의 마음과 몸을 대표한다면 오른손은 선(善)을, 왼손은 악(惡)을 상징한다. “법과 형제들에게 총 겨누는 법”(‘이하 코뿔새가 태양의 심장을 찔렀을 때’)을 가르치고, “나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녔다”는 것은 스스로 이단(異端)임을 자인하는 행위다. “총 맞은 쓰레기봉투”에서는 자학과 자포자기가, “하얗게 분리된 내가/ 푹푹 썩어 가는 중”에서는 자기 환멸과 좌절이 포착된다.

눈이 내려야 할 크리스마스에 비가 내리고, 선물로 받은 곰은 버려져 있다. 시인은 냄새 풀풀 풍기는 더러운 세상을 “랄, 랄, 랄” 즐겁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어 결혼”(‘내 이름에 침을 뱉었다’)한 것처럼 이런 상황은 내가 진정 원한 것이 아니다. 비를 맞으면 겉만 젖는 게 아니라 몸까지 젖는다. 시인은 겉으론 괜찮은 척, 행복한 척하지만 속으론 꺼이꺼이 울고 있다.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석민재/파란/132쪽/1만원.


[시인의 집] 이건 네가 아무리 우겨도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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