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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여기 쏟아질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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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12.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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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고주희 시인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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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한 고주희(1976~ ) 시인의 첫 시집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을 읽다 보면 자아와 세상(타자) 사이에 놓인 ‘긴장’의 끈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지속적인 상황 혹은 환경에 자아는 늘 불안하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것 같지만 속으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 긴장과 불안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음악이지만 시인은 “내 속의 검은 피”(‘나의 누드 속 와인’)와 음악이 혼합된 죽음 같은 통증을 견디거나 혹은 은밀히 즐기고 있다.

일곱 번의 계절이 포도 한 알을 깨운다

먹구름의 방향을 보며 화요일인지 목요일인지
신맛과 장마를 끊임없이 감별하며
입안에 머금은 몇 초, 아직 열리지 않았다 감각은

오래전 풍습으로 항아리에 묻어둔 계절이
성급한 과즙으로 부풀어 오를 때
내 어두운 귓속을 파고드는 아직 오지 않은 맛
시간은 이제 평등해, 말하고 싶지만

달과 별을 기준으로
내 오른쪽은 좀 더 새콤하게 미쳤고
쉽게 물러지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저주한다
화요일, 베르주 화요일

보랏빛 낯을 씻어도 그 속엔 내가 없다
질문이 짙어질수록 윤곽이 사라지는 질문

십 년, 이십 년을 내다보는 어둠은
코르크 냄새를 지우며 서서히 팽창할 거야

첫 수확이 끝나고 파티를 한다
눈빛이 이미 틀어져 버린 사람들

- ‘베르주 화요일’ 전문


“일곱 번의 계절” 만에 겨우 포도가 열렸는데, 연일 먹구름이 몰려오는 장마의 계절이다. 장마가 길어지면 포도의 당도가 떨어진다. 성급한 마음에 포도 한 알을 따서 맛을 본다. 채 익지 않아 신맛이 강한 베르주(Verjus), 특별한 경우 아니면 포도주를 담글 수 없는 상태다.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다. 하지만 포도의 상태와 상관없이 “오래전 풍습”으로 포도주를 담가 “항아리에 묻어둔”다. 포도주가 숙성되는 시간은 공평할 수 있지만 맛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만약 이 모든 상황이 결혼이라면, 신맛 나는 화요일은 아내, 장마로 당도가 떨어진 목요일은 남편이라면, ‘같이 살다 보면 정든다’며 강제로 시킨 결혼(물론 아닐 수도 있다)이라면 캄캄한 항아리 속에서 숙성되어가는 과정은 정말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 속엔 내가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어둠 속에서 오랜 세월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져 봐도 포도나무에 달려 있던 싱싱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매년 봄이 찾아오고 포도가 열려도 내가 원하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순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쉽게 물러지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저주”한다.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으므로 결국 “당신은 흔적도 없이 떠나”(‘누드 속의 와인’)고, 나는 “십 년, 이십 년을 내다보는 어둠”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코르크 냄새를 지우며 서서히 팽창”한다. 만약 그 팽창이 시(詩)라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눈물 너머, 약간의 천국”(‘시인의 말’)이라면, 하여 ‘새콤’한 ‘베르주 화요일’로 첫 시집을 연 것이라면….

펑펑 울고 나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창밖에 없는 것들을 믿었다면
더 멀리 갈 수도 있었겠지

어떤 것은 오래됐고 어떤 것은 새것이었다

한쪽 눈을 감으면 다른 빛이 열리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낮과 밤이
구겨진 백지로 버려지는 아침

참았던 분노는 왜 아이가 어질러 놓은
방바닥에서 시작되는가

두 눈을 껌뻑이며 너는 왜
색연필을 뒤로 감추는가 색종이 조각을 줍는가

능숙하게 화를 받아 내고
비 맞은 개처럼 정물화처럼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가

반복되는 용서 앞에서 얼마나 더
무참해질 수 있는가

잠이 들면 나를 제외한 몸들이 밝아 오는
희고 깨끗한 자작나무로의 먼 길

- ‘확장되는 백야’ 전문


“낮보다도 밝은 공포”(이하 ‘욥의 아내’)를 견딘 “그녀는 생존자”인 셈이다. 하지만 “천 번의 태풍을 맞이하며 몸속에” 새긴 ‘새것’, 즉 아이가 곁에 있다. 이때부터 “눈빛이 이미 틀어져 버린 사람들”을 속이거나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위장이 시작된다. 그래야 나와 내 가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눈뜨는 고통이 시작”(‘버드 스트라이크’)된 것이다.

하지만 제주라는 “섬엔 비밀이 없다는 게 비밀”(‘사기꾼이 완성되는 계절’)이다. “백 년째 같은 자세로 서 있는 나무는/ 하나의 물성을 가진 어둠”(‘극지’)인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과 상처는 점차 가중된다. “펑펑 울고” 난 후 “더 멀리 갈 수도 있었”지만 끝내 고향 제주를 떠나지 못해 겪어야만 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사라질 수 있을까”(‘자정의 새’)를 고민하다 하얗게 밤을 지새운다. “견딜 수 없는 낮과 밤”의 연속이다. 불안이 유발한 분노는 엉뚱하게도 방바닥을 어지럽혀 놓은 아이에게 향한다. 느닷없는 엄마의 분노에 아이는 “두 눈을 껌뻑이며” 엄마의 눈치를 보다가 “색연필을 뒤로 감추”고는 서둘러 방바닥에 떨어진 “색종이 조각을 줍는”다.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아이의 모습에 문득 정신을 차린 엄마는 미안하다며 아이에게 용서를 구한다.

문제는 이런 날들이 반복된다는 데 있다. “반송 따윈 없는 미래”(‘모래시계’)에 불안의 가시에 찔려 내면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막의 엉겅퀴에 맛을 들인 낙타처럼 멈출 수 없는, 그런….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시작일까 멈춤일까

당신을 놓친 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주저앉았다

매일 바다를 걷는 현무암,
서로의 숨구멍을 틀어막는 태풍과 눈보라의 긴 발작,
등을 맞댈 때마다
뜻밖의 섬이 태어났다

처음의 얼굴을 되짚으며
잠든 이름 흔들어 깨우는 바람
부르튼 입술 매만지며
내가 당신이, 당신이 내가 되던 서우봉에서

야트막한 여(礖)를 품었던 마음 버리고
하염없이 물 밖을 걸어 나오는 일

파고가 잔잔한 봄날
레코드판에 새겨진 한 사람의 지문처럼
흰 모래는 영원히 반복되고

약속된 자정의 주소를 지우면

여기 쏟아질 한 사람

- ‘함덕, 829’ 전문


시인이 “온 방향이 허물어져 캄캄한 날”(‘대마젤란성운’)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밤으로 가득”한 “최초의 음악”과 내 의지로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버드 스트라이크’)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와 신발을 벗고 “이른 해변”(‘협재’)을 같이 걸었다는 추억만으로도 “상처는 밤이 아닌 그 무엇”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같이할 것 같던 사람도 결국 떠났다. 사랑과 이별의 시들이 많은 까닭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주저앉”아 울어보지만 “붉게 발효된 시간은 쉽게 흡수”(‘나의 누드 속 와인’)어 삶을 숙성시킨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은 멈춤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지금은 “사랑이라는 돌멩이를 저 멀리 던져 버”(‘짧았던 봄’)리지만, “우리가 견딘 모든 것이 사랑이라면”(‘대마젤란성운’) “실패한 몽상가의 흔적”(‘뒷모습의 세계’) 하나쯤 지상에 남겨도 좋으리라. 이제 “어디를 건드려도 폭발할”(‘대마젤란성운’) 것 같은 시와 “여기 쏟아질 한 사람”을 기다리며 “희고 깨끗한 자작나무로의 먼 길”을 느긋하게 산책해도 되리라.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고주희 지음. 파란 펴냄. 168쪽/1만원.


[시인의 집] 여기 쏟아질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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