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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몸을 뒤틀며 우는 날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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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20.01.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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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길상호 시인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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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길상호(1973~ )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는 다소 긴 제목이 상징하듯, 어제나 내일이 아닌 오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제가 과거 세대(특히 돌아가신 부모님)라면 내일은 미래 세대(반려동물을 포함한)일 것이고, 과거와 미래의 관계를 이어주는 오늘의 이야기, 즉 현재의 삶을 빼어난 솜씨로 풀어놓고 있다.

‘오늘’이 불쑥 생겨난 게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경험)를 바탕인 관계로 이번 시집에서 “영혼처럼 그 자리에 남”(‘스티커’)아 있는 부모님에 대한 시편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한 인터뷰에 의하면 두 집 살림)로 홀로 가정을 돌본 어머니에 대한 연민, 아버지에 대한 애증 그리고 이를 통한 삶의 성찰이 시로 되살아난다.

숲 옆구리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 안쪽 오래전 상형문자가 되어 날아간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책등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자니
그것 또한 새가 남긴 책의 내용일 것 같아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젖은 것도 같고 마른 것도 같은 소리는
오랫동안 앓던 환청이 도진 거라고
너는 나의 두 귀를 손으로 감싸 막았다

지문을 풀고 나온 바람이 고막에 닿자
책은 목소리를 잃고 잠잠해졌지만
나는 좀처럼 정적이 편해지지 않았다

죽은 나무들로 빽빽한 숲
이따금 삭은 가지라도 바닥에 떨어져야
멈춘 시계가 다시 돌아갈 것 같았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없는지 페이지를 넘길 때
너는 숲의 비밀이 적힌 두루마리라며
나이테 한 올을 풀어 쥐어주었다

첫 단어에 눈길이 닿는 순간
숲이 백지 같은 안개로 가득 채워졌다
뿌연 눈으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 ‘안개 책방’ 전문


먼저 시 ‘안개 책방’을 살펴보자. 이 시에서 숲은 현생이 아닌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숲의 옆구리에서” 꺼낸 책은 슬픈 시인의 가계(家系)와 다름없다. “표지 안쪽”은 나와 가까운, “오래전”은 돌아가신지 좀 됐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숲에 든 후, 나는 남겨진 꼬리 같았다/ 몸을 뒤틀며 우는 날이 많아졌다”(‘꼬리’)나 고양이가 책등을 긁는데 “죽은 아버지는 시원하다 하실까?”(‘책등에 기대 잠이 들었지’)라는 구절을 감안할 때 ‘직박구리’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상징한다.

창가에서 한쪽이 썩어가는 모과(‘모과와 지난 밤’)에서 아버지를 떠올리고, “감자 한 바구니를 사는데/ 몇 알 얹어”(‘덤’)준 덤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생각하고,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나 “어느 날의 술잔 속에서”(‘닮은 사람’)도 아버지의 울음을 듣는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 그리움에 더 가깝다. 하여 “직박구리 울음소리”는 아버지의 울음이라기보다 시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울음일 게다.

시인은 “책등에 쌓인 먼지”조차 아버지가 남긴 흔적 같아 머뭇거린다. “오랫동안 앓던 환청”과 편해지지 않는 정적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애증도 드러낸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죽은 나무들로 빽빽한 숲” 같다. 무언가 작은 계기라도 있어야 “멈춘 시계”, 즉 아버지에 대한 생각(감정)이 바뀔 것 같다. “숲의 비밀이 적힌 두루마리”에서 “첫 단어에 눈길이 닿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버지와 화해의 순간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시인은 “안개로 가득 채워”져 보이지 않는 “무척이나 어려운 책”(‘시인의 말’), 아버지라는 존재를 계속 읽어갈 것이다.

트럭에 치인 새끼 목덜미를 물고 와
모래 구덩이에 눕혀놓고서

어미 고양이가 할 수 있는 건 오래 핥아대는 일

빛바랜 혀를 꺼내서
털에 배어든 핏물을 닦아댈 때마다

노을은 죽은 피처럼 굳어가고 있었네

핥으면서꺼진 숨을 맛보았을 혀,
닦으면서 붉은 눈물을 삼켰을 혀,

어미는 새끼를 묻어놓고 어디에다 또
야옹, 옹관묘 같은 울음을 내려놓을까

은행나무가 수의로 바닥을 곱게 덮어놓았네

- ‘혀로 염하다’ 전문


현재 시인 곁에는 ‘물어, 운문이, 산문이’라는 세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이들은 시의 영감을 주는, 삶의 반려자이기도 하다. 어제의 이야기가 돌아가신 부모라면 고양이 세 마리는 오늘과 내일의 이야기다. 시인은 밤새도록 “지난 생의 못다 한 대화”(‘야옹야옹 쌓이는’)를 한다. 시인이 키우는 고양이는 “당신의 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꼬리”(‘내일 모레 고양이’), 즉 부모님의 후생인 셈이다.

헌데 고양이 새끼가 트럭에 치였다. 아마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어미 고양이는 장례를 치르듯 새끼를 “모래 구덩이에 눕혀놓고서” 오래 핥고 있다. “핥으면서 꺼진 숨을 맛보았을 혀,/ 닦으면서 붉은 눈물을 삼켰을 혀”에 자식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인에게 고양이는 고양이 그 이상이다.

넝쿨장미는 찢어진 담장을 꿰매는 중
민무늬 벽에는 꽃 단추도 여러 개 달아놓았다

어떤 호흡으로 걸어도 몸에 익숙한 골목
낡은 사랑을 수선해 쓰는 우리는
수시로 이곳에 와 어제와 내일을 덧대곤 했다

각이 풀린 주름의 계단에 앉아
서로의 헐거워진 어깨에 기대 있으면
가난도 또 다른 멋이 될 수 있었다

빨랫줄에 걸린 달도 빛이 바래 있었지만
거기서 번져오는 쿰쿰한 냄새 때문에
끝단이 닳아버린 우리의 손목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 골목에선 지울 수 없는 얼룩까지
세상 하나뿐인 무늬로 바뀌곤 했다

- ‘빈티지’ 전문


원래 빈티지는 포도가 풍작인 해에 정평 있는 양조원에서 양질의 포도로 만든 고급 포도주로, 라벨에 상표와 포도의 생산 연도 따위를 명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의미가 변해 낡은 스타일을 지칭한다. “찢어진 담장을 꿰매는” 넝쿨장미처럼 골목은 “어제와 내일”의 우리 사랑을 확인하는 빈티지 공간이다. “수시로 이곳”을 찾아온다는 것은 과거처럼 현재의 삶과 사랑이 궁핍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갈라진 담장 사이의 ‘넝쿨장미’나 어제와 내일 사이의 ‘오늘’, 전생과 후생 사이의 ‘현생’, 부모와 고양이 사이의 ‘나’처럼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자주 그런 공간에 머문다. “민무늬 벽”에 “꽃 단추도 여러 개 달아놓”지만 스스로 담장이 되진 않는다. 가난이 “또 다른 멋이 될 수 있었”던 건 과거의 일이다. “지울 수 없는 얼룩”인 가난은 물려줘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 하나뿐인 무늬”와 다름없다.

시 ‘두 잔 집’은 시인의 성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역할은 잘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대상이 되면 침묵하고 만다. 처음 만난 우리는 술집에 마주앉아 있다. 처음이지만 “전생에 두 번쯤은 만난 적 있는 사이”라는 건 서로 마음에 든다는 의미다. 하지만 탁자에 마주앉아 말없이 앉아 술만 마시고 있다. 찌개는 손도 안 대고 이따금 “들깨소금만 몇 알씩” 먹을 뿐이다. 어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술이 좀 들어가서야 대화를 하는데, 그마저도 뚝뚝 끊긴다. 그 사이 만남과 헤어짐의 갈등이 수차례 교차한다.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는 연원에는 결국 가난과 아버지가 있다. 후대에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흉터까지 닮”(‘닮은 사람’)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결이 고운 나무탁자”는 어머니의 다른 표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데도 망설이는 건 어머니의 운명이 오버랩 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또다시 두 잔의 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무거운 과거의 짐을 내려놓는 일이다. 아버지라는 “사라진 책”(‘시인의 말’)을 내려놓아야 더 환한 “내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길상호 지음. 걷는사람 펴냄. 152쪽/1만원.


[시인의 집]몸을 뒤틀며 우는 날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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