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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상처가 없는 생은 기쁨의 무게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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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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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김밝은 시인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

[시인의 집]상처가 없는 생은 기쁨의 무게를 모른다
2013년 ‘미네르바’로 등단한 김밝은(1964~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에는 “길 위의 시간을 껴안고”(‘바다, 에돌아가다’) “저만치서 머뭇거리”(이팝나무 아래서)거나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현재에서 과거를 응시하는 시인은 “아름다운 고행”(이하 ‘소설小雪 즈음’)처럼 “무뎌지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길 위의 시인은 외롭거나 쓸쓸하지는 않지만, 여행지에 도착해선 자꾸 눈앞이 흐려진다. 특히 금오도나 덕적도, 제주 애월(涯月) 같은 바닷가에 혼자 앉아 바다와 대화를 하거나 그리운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운 이들은 다 바닷물 건너 시간의 섬 뒤에 있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름다운 한때를 떠올”(‘애월涯月을 그리다 11’)리며 “울음을 만지작거”(‘비가 오네요, 입술을 떼면 –금오도에서’)리는 것뿐이다.

시인이 기억하는 섬에는 “그리운 소식이 가득한 자작나무숲”(‘시인의 말’)이 있고, 살구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집이 있고, 그 집에는 “어린 것을 두고/ 훌훌 떠나버린 딸년을 욕”(‘동백꽃’)하는 할머니가 있다. 아니 있었다. 시인이 자주 바닷가를 서성이는 이유는“악아, 내 새끼/ 밥은 먹고 댕기냐”(‘이팝나무 아래서’)며 걱정해주는 할머니와 “오래도록 소식 없이 흔들리던 이름”(‘겨울, 길을 놓치거나 혹은 잃었거나’)에 대한 그리움과 상처 때문이다. 이제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의 섬이다.

슬픔을 탈탈 털어 햇빛에 말려도
뽀송뽀송해지지 않던 날들

그리운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할 때마다
푸른 물방울무늬를 하나씩 허공에 그렸어요

언니의 손을 놓치고
낯선 아저씨가 내민 손에 울음을 내려놓으며,
마취도 없이 의사의 수술칼이 내 귀를 건드린 후
이겨내지 못할 아픔도 있다는 걸 일찍 배워버린 곳

오래도록 내 몸에 머물렀던 불운마저
친구처럼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지요

낯설어진 이름들이 가끔은
가족이라는 얼굴로 다시 모이기도 했지만
어디론가 숨어버린 오빠의 이름은
꺼내서는 안 되는 비밀이어서

봄날 대나무 숲에는 새소리 대신
독 품은 뱀들만 알을 낳아 제 식구를 늘려가곤 했습니다

잠시 눈물을 닦기도 했던
나는 어디쯤에서 사라진 얼굴일까요

푸른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은 계집애
은목서꽃 향기 날리는 골목길에서
시간의 조각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어요

- ‘흔적’ 전문


문득문득 “뾰족한 시간의 조각들”(이하 ‘이팝나무 아래서’)이 심장을 찌를 때마다 시인은 길을 떠나 섬을 찾는다. 하지만 시인이 찾는 그 섬은 아니다. 행복은 현재를 자꾸 의심하고 되돌아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상처가 없는 생은 기쁨의 날개를 달 수 없을 거”(이하 ‘내일, 능소화가 피었다’)라는 생각에 “입 밖으로 보내지 못한 말들”을 견디지만, “어제 같은 오늘이 다시 되풀이”(‘이팝나무 아래서’)된다.

일찍이 “언니의 손을 놓”쳐버렸고, 오빠는 “어디론가 숨어버”려 “꺼내서는 안 되는 비밀”이 되었고, 엄마는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개펄에 몸을 담그고 살”(‘분홍을 펼치면, 나비들 손끝에서 울먹이고’)다 끝내 떠났고, 아버지는 “하늘에 사다리를 걸고라도 찾아보고 싶”(‘아버지라는 밥’)을 만큼 가족은 해체되었다. 가족사에서 할머니만 유일한 위안이자 그리움의 원천이다.

현재의 삶과 과거의 삶이 빚어내는 풍경의 괴리가 시인을 방황하게 한다. 시인은 “눈물의 시간”(‘감쪽 같은, 어라연’), “목덜미를 잡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시간”(‘11월, 맨드라미’), “약속받지 못한 시간”(‘나무들의 눈동자를 읽는 시간’), “야금야금 환한 기억을 갉아먹는 시간”(‘애월涯月을 그리다 8’)을 보내지만, 이는 “울면서도, 끝내 환해지는 시간”(‘어쩌다,’)이다. 오래된 슬픔은 햇빛 쨍쨍한 날에도 쉽게 “뽀송뽀송해지지 않”는다.

같은 마음이라 믿었던 사람을 선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함께 채워 넣었던 문장들을 지워버리자
‘우리’라는 시절이 단번에 사라졌다

애초에 동그란 얼굴이 아니었다고,
가끔은 네모 어쩌다는 마름모의 얼굴을 하고
나를 곁눈질했을 것이라 믿었다

바다로 열린 창가에 앉아 해 지는 서쪽을 바라보며
아직 풀지 않은 선물처럼
마음 간질이는 가을의 손을 꼭 잡아도

쫓아내버린 이름
구불텅해진 기억들은
바늘을 삼킨 것처럼 견디기 힘들 거라고

스스로에게 삿대질을 하면서도
튕겨져 나온 프레임 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 ‘프레임의 법칙’ 전문


가족의 해체와 부재는 ‘나’라는 존재를 왜소하게 한다. “오랜 시간의 지문을 가득 품은 얼굴”(‘매화방창梅花方暢’)이나 이름, 냄새는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고, “어디에 품어야 될 지 모르겠는 입”(‘오래 바라보면 눈물이 날지도 모르는’) 혹은 입술은 하지 못한 말을 상징한다. 시가 자꾸 “시간의 조각을 흔”드는 건 그만큼 ‘어린 나’의 상처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결핍과 슬픔을 견디는 힘은 “상처가 없는 생은 기쁨의 무게를 모르는 법”(‘내일, 능소화가 피었다’)이라는 인식과 “끝내 내려놓을 수 없는”(‘시인의 말’) 시 덕분이다. 아픈 과거를 포용해줄 수 있는 것도 행복한 현재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현재의 행복은 시가 자꾸 과거를 추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마음이라 믿었던 사람을 선 밖으로 밀어내 버”리는 상황은 아프다. ‘우리’라고 할 만큼 가까운 사이이기에 상처가 더 컸을 것이다.

사람을 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채워 넣었던 문장들을 지워버리자/ ‘우리’라는 시절이 단번에 사라졌다”지만 내 몸에 각인된 것들은 “바늘을 삼킨 것처럼 견디기 힘들”다. “바다로 열린 창가”에 앉는 행위는 아픈 과거를 소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스스로에게 삿대질”을 하며 마음을 다독인 후에야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카페를 나선다.

시인은 다시 바닷가에 서 있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 섬들을 하나둘/ 저물녘 하늘에 풀어놓”는(이하 ‘바다, 에돌아가다’)다. “어느 시절만을 기억하려 애쓰다가” 정착 현재의 풍경을 놓친다. “아직 한 줄도 읽어내지 못했”다. 첫 시집에 이어 “분홍의 시간”(‘자미화’)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임 속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무심결에 과거의 프레임에 갇혔는지도 모른다.

프레임은 어떤 조건에 대해 거의 무조건 반응하는 경향을 말하는데, ‘마음의 창’에 비유되곤 한다. 반면 프레임의 법칙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갖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프레임 대신 프레임의 법칙으로 무장한 시인은 자신만 아는 문을 열고자 한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찢겨져버린 시간의 응어리들이/ 새파랗게 멍든 이야기들”(이하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프레임이다.

하지만 아직 열지 않은 문을 열면 “얼굴 기대고 싶”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프레임의 법칙이다. “열어두겠다던 다른 쪽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자작나무숲에는 우리가 모르는 문이 있다=김밝은 지음. 미네르바 펴냄, 130쪽/9000원.


[시인의 집]상처가 없는 생은 기쁨의 무게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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