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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생 김영수[남기자의 체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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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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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2.22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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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건강 잊고 밤낮 달리던 게 '미덕(美德)'…75세면 떠나던 삶 갑자기 100세로, "준비도 못했는데"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매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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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임종철 디자이너
62년생 김영수[남기자의 체헐리즘]
"영수야!"

57세 김영수씨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부르는 게 아닌 것쯤은 알았다. 동네서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구나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데, 누가 그를 반말로 부르겠는가. 그래도 자기 이름을 외치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뒤를 봤다. 시선이 닿은 곳엔 서너살 남짓한 아이가 넘어져 있었다. 엄마가 아이를 다급히 일으켰다. "조심하라 했어, 안했어?" 핀잔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이 이어졌다. 아이는 울듯 말듯, 울먹이다 엄마 품에 안겼다. 김영수씨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예전엔 아이를 짐처럼 느꼈었는데, 언젠가부터 예쁘단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이를 먹나 싶었다. 그리곤 자신이 아이와 비슷하다 여겼다. 열심히 달리다가 넘어졌는데, 그냥 주저 앉아 있는. 아이와 다른 건, 이젠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단 것이었다. 문득 서글퍼졌다.

"늙어서 그래, 늙어서."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남성 호르몬이 줄고, 여성 호르몬이 늘기 때문이라며. 청승 떨지 말고, 소주나 마시라며 재촉하는 친구들 잔을 받고, 그도 채워줬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비슷했다.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같이 있을 때만 괜찮을 뿐, 홀로 있을 땐 어김 없이 똑같은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래서 언젠가부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어느 가을날 아침, 아내에게도 이런 얘길 털어놨다. 그러자 "그러게, 가게 그만두고 한가해서 그래.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뭐라도 좀 배워. 사람들도 좀 만나고"란 대답이 돌아왔다. 정 할 것 없으면 집안일이나 좀 도우라는 말도 함께. 김영수씨는 "이제 설거지는 내가 하잖아"라며 소심한 대꾸를 해봤다. 세탁기에 세제를 붓던 아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김영수씨는 쇼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볼 게 마땅히 없어 채널만 돌리다, '떡갈비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준다'는 홈쇼핑 광고에 빠져 들었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치이이익'하고 굽는 소리가, 침샘을 여간 자극하는 게 아녔다. 구매욕이 차오를 무렵, '위이이잉' 하는 청소기 소리가 정적을 깼다. 아내였다.

집안일을 돕긴 싫어, 괜히 자식들 방문 앞을 서성거렸다. 아들만 둘이었다. 어릴 땐 목욕탕에, 등산까지 곧잘 따라다니던 아들들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딴판이 됐다. 무뚝뚝해졌다. "밥 먹었어?", "네", "이제 들어와?", "네", "잘자라", "안녕히 주무세요" 정도였다. 여지껏 존댓말을 쓰는 건 김영수씨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예절 교육을 시킨 덕분이었다. 남한테 피해주면 안된다며, 다그친 탓에 김영수씨 기준에 착하게 잘 자랐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사이는 어쩐지 불편했다.
/그래픽=유정수 디자인기자
/그래픽=유정수 디자인기자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 하루가 참 천천히가지 싶었다. 김영수씨는 '강아지라도 키울까' 생각하며 산책을 나가다, 우연히 아파트 1층 안내판에 붙은 종이 한 장을 봤다. 동네 도서관에서 '자서전(自敍傳)' 특강을 한다고 했다. 심리 치유와 치매 예방에 좋다는 문구와 함께. '무슨 벌써 치매야'라고 발끈하면서도, 김영수씨는 안내문을 물끄러미 봤다. 그리고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한 손 크기의 수첩과, 펜 하나를 꺼내 강의 시작 날짜와 수강 등록 방법을 적었다. 강의는 일주일에 2번씩 총 16회, 한 번에 2시간, 그리고 한 달에 4만원이라고 했다. '뭐라도 좀 배워'란 아내 말을 다시 떠올린 김영수씨는, 이참에 살아온 궤적을 한 번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은 자서전 수강을 열심히 한, 김영수씨의 기록들이다.



'오래 살라'며 영수로 이름 지었다


김영수씨는 1962년, 서울서 태어났다. 4남매 중 막내였다. 영수(永壽)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손수 지었다. 오래 살란 마음이 담겼다. 영수 아버지는 한자 뜻을 뭘로 할 지 고민했다. 영수(靈秀: 뛰어나고 빼어나다)로 할까도 생각했다. 그래도 아들이 장수하는 게 최고지 싶어, 영수(永壽)로 정했다. 이름을 지을 때 '누나'가 생각났다는 얘길, 김영수씨는 스무살이 된 뒤에야 들었다. 그보다 1년 먼저 태어났다가 일찍 죽었다고 했던. 어쨌거나 김영수씨는 그의 이름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이름이었다. 출석 부를 때 한 반에 두 명쯤은 "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래서 '김영수1', '김영수2'나 '김영수A', '김영수B처럼 구분이 필요했다.

어릴 때, 김영수씨 집은 형편이 괜찮은 편이었다.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업을 했었고, 양옥집에 살았다. 단칸방에 여섯, 일곱 가족이 몰려사는 가난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난 잘났고, 넌 못났다' 그런 시대가 아녔다. 서로 어울려 살줄 알았다. 김영수씨 어머니는, 그에게 "언제든 친구들을 데려와 놀아도 된다"고 일렀다. 딱히 놀이가 없던 시절, 김영수씨는 친구들하고 동네 강가서 제기차기를 하거나, 선 그어놓고 땅따먹기를 하거나, 공이 있을 땐 피구를 하거나 했다. 실컷 놀다 허기지면 친구들은 "영수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김영수씨 집에 쇠붙이가 많다며, 엿을 바꿔 먹을 수 있어 좋다고 신나했다. 그러면 김영수씨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점심도 차려주고, 사탕도 주고 그랬다. 친구들이 웃는 걸 보면 김영수씨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 1학년 때 김영수씨는 '인정' 이란 걸 처음 받았다. 학교에서 건치(健齒: 건강한 치아) 아동을 뽑았었는데, 김영수씨가 당당히 뽑혔다. 1학년 전체서 단 한 명만 뽑는 거라, 그의 기분이 썩 좋았다. 치과 의사가 나와서 김영수씨에게 상을 주는 순간, 그는 어머니를 힐끔 바라봤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때 담임 선생님이 김영수씨 어머니에게 "양호 선생님이 신경 써줬다, 인사 좀 하라"고 한 의미를, 김영수씨는 머리가 굵어진 뒤에야 알았다. 그땐 그런 압력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생각해보면 참 묘한 시절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다. 그게 '표준' 이었다. 김영수씨는 조용하고 또 차분한 성격이었다. 공부는 반에서 중간 정도했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 편이었다.

학창 시절엔 억울한 일이 더러 있었는데, 선생님에게 맞을 때가 그랬다. 유달리 괴팍스런 영어 선생님이 있었는데, 기분이 들쭉날쭉한 편이었다. 하루는 기분이 안 좋았는지, 반에서 한 무리가 시끄럽게 했단 이유로 단체 기합을 받았다. 조용히 있었던 김영수씨도 앞 친구 책상을 잡고, 허벅지 뒤쪽을 맞았다. 그날 내내 욱신거렸던 부위는, 집에 와보니 피멍이 들어 있었다. 김영수씨는 어머니에게 상처를 고이 숨겼다. 말했다간 "학교서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혼났냐"며 또 맞을 게 뻔했으니까. 이래저래 맞아도, 관대했던 때였다. 도시락 검사를 해서, 혼식(쌀밥과 보리밥을 섞는 것)을 안했단 이유로도 몽둥이 찜질을 당했으니까.



아버지는 떠나고, 어머니 웃음은 멈췄다


김영수씨 기억 속 아버지는, 근엄하고 엄격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김영수씨에겐 "우리 막내, 우리 아들"이라며 유독 사랑을 많이줬다. 지갑에 김영수씨 사진도 꼬깃꼬깃 넣어 가지고 다녔다. 아버지가 술을 한 잔 한 날에는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나오고…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란 노래를 부르며 집에 왔다. 걸쭉한 소리가 문 밖에서 어렴풋이 들릴 때면, 김영수씨는 "아빠가 왔구나" 생각하며 마중을 나갔다. 그러면 아버지는 김영수씨를 번쩍 들고, 그날 내내 길게 자란, 수염난 얼굴을 부비곤 했다. 김영수씨는 그 까칠까칠한 감촉이 싫었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꾹 참았다. 아버지 손에 국화빵 봉지 하나라도 들려 있는 날에는, 더욱더 그랬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김영수씨 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눈썰매를 만들어줬다. 김영수씨는 "아빠가 눈썰매를 만들어줬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난리였다. 완성된 눈썰매를 집안에 창고에 고이 모셔놓은 뒤, 눈이 오기 만을 눈 빠지게 기다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잠도 안 깬 채로 바깥에 달려나가 눈이 내렸는 지 확인했다. 언젠가, 함박눈이 펑펑 내린 날 김영수씨는 뒷산으로 올라가 원 없이 눈썰매를 탔다. 넘어지고, 뒤집어지고, 신발하고 옷까지 다 젖었지만,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단 한 번, 아버지가 눈썰매를 직접 끌어줬을 때 그 뒷모습을 기억하게 됐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김영수씨가 중학교 1학년일 때 멈췄다. 아버지 나이가 쉰 정도 됐을 때였다. 일이 잘 안 풀리는 시간을 보내면서, 과로와 과음 등 몸에 무리가 많이 갔다. 체중이 계속 줄어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었다. 너무 늦었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아버지는 김영수씨를 불렀다. "아빠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 울지 말아라, 아빠가 죽으면 아무도 찾지 말고 OO 아저씨를 찾아가라, 정리가 되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생활하는 데 지장 없을거다." 김영수씨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음 약하게 먹지 마세요, 절대 돌아가시지 않아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아버지 유언(遺言)이 됐다. 그날 이후 김영수씨는 힘들 때마다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막걸리와 소주를 사들고. 대답이 없어도 "아버지, 저 왔어요"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내려놨다. '마음의 고향'이었다.

김영수씨 어머니는 그때부터 통 웃질 않았다. 마흔셋, 아직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예전엔 김영수씨가 밥만 잘 먹어도 "우리 영수, 밥 잘 먹어서 좋네"하며 웃던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떠난 뒤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변해갔다. 이웃집 아주머니 몇몇은, 김영수씨와 그의 어머니를 보며 "그래도 안 도망가고 잘 키우네"라고 했다. 그럴 때면, 김영수씨 어머니는 대꾸도 않고 지나쳐버렸다. 김영수씨 아버지 사진은, 화장대 마지막 서랍 안에 한 장만 남겨뒀다. 김영수씨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아버지 얘긴 일부러 안 꺼냈다. 하루 종일 궂은 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지친 표정을 볼 때마다, 김영수씨는 빨리 '좋은 가장'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첫 월급을 어머니께 드렸다


1981년, 김영수씨는 대학생이 됐다. 그리고 경제학을 전공했다. 민주화 열망이 뜨거웠고, 사복 경찰이 '불온물'이 없는 지 가방을 일일이 검사하던 시절이었다. 매일 술 먹고 놀러 다니고도, 취업은 여러군데 돼서 골라 갔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김영수씨는, 대출을 두 번 받고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 은사가 소개시켜준 학생들을 가르쳐서 생활비 정도는 벌었다. 그 당시 한 달 과외비가 5만원 정도였다. 한 번은 세 명을 합쳐 집단 과외를 해서, 15만원씩 받기도 했다. 가장 많이 벌어본 기억이었다.

1988년, 27살이 되던 해 김영수씨는 첫 직장을 얻었다. 그도 서너군데 직장에 붙었는데, 그중 백화점으로 갔다. 유통·증권·보험·호텔 등 산업이 한창 뜰 때였다. 김영수씨는 유통 산업이 많이 발전되리라 생각했다. 증권회사도 고민했지만, 오래 성장할 것 같지 않아 선택하지 않았다. 첫 업무는 남성복 매장에서 와이셔츠를 파는 거였다. 600장씩 가져다 놓고 팔았는데, 친구며 지인들이 와서 하나씩 사주곤 했다. 첫 월급은, 24만원을 받았다. 인턴이라고 해서, 3개월 동안은 원래 월급의 80%만 줬다.

김영수씨는 첫 월급을 봉투에 모두 넣은 뒤, 어머니를 찾아갔다. 정장을 입고, 큰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받은 월급입니다, 어머니. 얼마 안되지만 받아주세요. 그동안 혼자서 저희 키워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그는 봉투째 월급을 어머니에게 드렸다. 김영수씨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수야, 네가 이렇게 잘 커서 정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길로 아버지 산소에도 찾아가 큰 절을 하며, 이런저런 넋두리를 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제서야 '어른'이 됐다는 기분이 들었다.

월급을 받으면서부터 김영수씨는 저금을 어떻게 해야되나 생각했다. 은행 금리가 15~20% 정도 됐었다. 검소가 몸에 뱄던 터라, 월급을 받고도 쉬 쓰게 되지 않았다. 한 달에 얼마를 저금할까 생각하고, 그 다음에 쓸 돈을 생각했다. 재형저축, 주택청약 등 저금을 나눠서 한 뒤 한 달에 10만원을 넘지 않는 돈으로 생활했다. 생활비가 없을 땐 하루에 한 끼만 먹기도 했다. 친구들이 보자고 할 땐 "약속이 있어서 못 나가겠다"며 거짓말도 했다. 보너스도 차곡차곡 모았다. 그렇게 대학교 등록금을 직장 다닌 지 1년도 안돼 모두 갚았다. 빚을 다 털게된 날, 김영수씨는 친한 친구들에게 삼겹살에 진로 소주 한 잔을 샀다.



'비타민' 하나에 반한 아내


김영수씨가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89년 스물 여덟 살이 되던 해 크리스마스였다. 연애할 여유가 없던 그에게 친한 후배가 좋은 사람이 있으니, 자꾸 만나보라며 보챘다. 크리스마스 당일, 종로 3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커피숍에는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김영수씨보다 4살 아래, 이름은 김영숙이라고 했다. 키는 160cm 정도에, 단아한 외모에 목소리가 맑고, 치열이 가지런했다.

몇 분간 말 없이 앉아 있다가, 김영수씨가 무뚝뚝하게 첫 질문을 했다. "취미가 뭐예요?" 그녀는 "소설 책 읽는 걸 좋아해요"라고 했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좋아하는 음악 등 의례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1시간 정도가 지난 뒤, 김영수씨가 "만나서 반가웠다"며 명함을 건넸다. 테이블 위엔 입도 대지 못한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김영수씨가 그녀에게 따로 연락하기까진 3일이 필요했다. 직장에 가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상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김영숙씨가 자꾸 생각났다. 얼마간 머뭇거린 뒤 김영수씨는 김영숙씨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김영수씨는 심한 감기에 걸린 상태였는데 그 모습을 본 김영숙씨가 핸드백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비타민'이었다. 그녀는 "감기가 많이 심한가 봐요. 이거라도 좀 드세요"라며 비타민을 건넸다. 그 순간 잠시 서로의 손이 스쳤다. 김영수씨에겐 그 말이, 그 손의 온기가 좀처럼 잊지 못할 만큼 따뜻했다. 그렇게 만난 지 두 달 만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


'아홉수'라 했던가, 김영수씨에게 스물 아홉 한 해는 참 가혹했다. 그해 봄,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아내가 임신을 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유산을 했다. 세상에 빛도 못 본 첫 아이가 그렇게 하늘나라로 갔다. 눈물을 펑펑 쏟는 아내에게 김영수씨는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냥 그렇게 된 것 뿐이지"라며 위로했다. 그리고 "세상 순리대로 따라서 살자"고 했다. 김영수씨 어머니가 그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인생사 굴곡이 심할 때면, 그는 그 말을 떠올리며 안 좋은 일들을 흘려 보내려 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김영수씨 어머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뇌출혈'이었다. 어머니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 "날 추워진다,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였다. 한창 업무에 열중하던 김영수씨는 "알았어요, 걱정마세요"라며 듣는둥 마는둥 전화를 끊었다.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현실감(感)이 없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본 뒤에야 김영수씨는 눈물이 쏟아졌다. 보름 만에 어머니는 병상에서 숨졌다. 첫 아이를 떠나보낸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김영수씨는 또 한 번의 상(喪)을 치렀다.

넋이 나간 김영수씨를, 직장에선 쉬 이해해주지 않았다. "많이 힘들지? 한 달만 쉬다와"라고 따뜻하게 말하는 이 따윈 아무도 없었다. 회사에선 "영업 실적이 왜 이러느냐, 매출이 부진하다"며 별도로 보고를 하라고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긴다)'란 말만 떠올리며 버틸 무렵, 아내가 다시 임신을 했다. 그리고 열 달 뒤, 10시간에 거친 산통 끝에 김영수씨는 '아버지'가 됐다. 새벽 다섯시 정도였다. 잠깐 담배를 피우러 가느라, 아이가 나오는 순간을 미처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김영수씨는 아내에게 평생 잔소릴 들어야 했다. "담배 피우고 싶은 것 조금만 참지, 애가 나오는 걸 못 보냐"고. 그렇게 2년 터울로, 김영수씨는 아들 둘을 낳았다. 아버지가 된 소감은 아내에겐 말 못했지만, 사실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얘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등이었다.

정신 없이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그리고 아버지가 된다는 마음을 절실히 느꼈다. 특히 아플 때가 그랬다. 술을 먹고 집에 왔더니, 갓 돌이 지난 둘째 아이가 아팠다. 별 수 없이 김영수씨 아내가 운전해서 병원에 가는데, 차 하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브레이크를 밟았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첫째 아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코피가 나는가 싶어 봤더니, 얼굴이 피범벅이 돼 있었다. 응급실로 향한 김영수씨 부부는 뇌 CT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바들바들 떨었다. 다행히 뇌에 이상은 없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김영수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여차하면 바로 병원에 데려가려고. 아내가 말했다. "대신 아파주고 싶어." 김영수씨도 대답했다. "나도 그래, 잠 좀 자."



회사 전화도 안 쓸 만큼 '충성'했는데… IMF에 무너지다


김영수씨 세대가 으레 그렇듯, '좌고우면(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곁눈질한다)' 할줄 몰랐다. 회사에서 시키면, 목표가 주어지면, 무조건 "가자, 앞으로"였다. 업무도 충성, 회식도 충성, 회사가 하라는대로, 우선순위를 그에 뒀었다. 김영수씨도 그랬다. 사례 하나가 회사 전화였다. 사적인 업무로 회사 전화를 한 통도 쓰지 않았다. '공중전화'를 썼다. 남들은 편히 연락할 때도, 김영수씨는 "개인적인 업무인데 회사 전화를 왜 쓰냐"며 고집을 부렸다. 그게 무려 1년 넘게 갔다, 아이가 아파 급한 연락을 할 때까지.

술도 아주 거하게 먹었다. 특별한 이슈가 있어서, 발전적 의미에서 갖는 술자리가 아녔다. 그냥 퇴근하고 나서 같이 나누는, '친교 시간' 같은 거였다. 주량이 반병 밖에 안되는 김영수씨는, 선·후배가 가자고 할 때 거절을 못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토하면서, 부어라마셔라 했다. 소주병이 맥주병처럼 쌓이고, 차가 끊길 시간이 되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그래도 젊음이 좋아, 그 다음 날이면 거뜬히 움직였다. 일도 죽기 살기로 했다. 아침 8시30분에 출근해서 밤 10시30분까지 일했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감안하면, 그야 말로 컴컴할 때 나와서 컴컴할 때 들어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담배를 세 갑씩 피우고 있었다. 술과 담배로 버티던 날들이었다. 1997년, 서른 여섯살이 되던 해 김영수씨는 '심정지'가 왔다. 술 마시고 와서 잠을 자던 중이었다. 다행히 아내가 발견했고, 응급실에 실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았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를 보는 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운이 없게도, 그해 11월21일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가 터졌다. 그가 다니던 백화점에서도 '구조조정'을 한다고 했다. 서로 눈치만 보며, 마음을 졸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설렁탕 한 그릇을 점심식사로 먹은 어느 날, 김영수씨가 명예퇴직 대상자로 지목됐단 소식을 들었다. 다닌 기간이 10년, 바친 시간이 3만3000시간. 하지만 자리를 깨끗하게 비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도 채 안됐다.

청춘(靑春) 바친 백화점은 그렇게 관두게 됐다. 1998년 봄이 지나가고, 여름 더위가 찾아올 무렵이었다. 첫째가 8살, 둘째가 6살. 김영수씨는 자신의 울분을 달랠 시간조차 없었다. 그를 목 빠지게 바라보는 식구(食口)만 세 명이었다. 기름값 아끼겠다고 대중교통을 타고, 땀이 마를 새도 없이, 일자리를 구하러 동분서주했다. 나라 전체가 파국인지라, 어디서도 그를 반기는 곳이 없었다. 그해 여름은 흡사 '지옥' 같았다. 매일 '출구 없는 하루'가 다시 찾아왔다. 아침이 오는 게 괴로웠다. 한강 다리 어디선가, 생(生)을 마감했다는 이들의 뉴스를 보며, 김영수씨는 '자신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를 매일 생각했다.



'노점 옷장사'를 하다 쫓겨나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통장 잔고가 위태로울 무렵, 김영수씨는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맘 먹었다. 백화점 바깥에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자고, 길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 그대로, 옷을 파는 노점상을 하기로 했다. 옷값에 거품이 있던 시절이라, 잘만 하면 꽤 남는 장사라고 했다. 의류 재고품을 싸게 사서, 현금을 받고 사람들에게 되파는 일이었다. 장사 첫날, 김영수씨는 길거리에 옷을 죽 늘어놓고, 조악한 가격표를 붙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와줄 것이라는 듯. 무심(無心)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구경을 실컷 하고, 단속반이 뜰까 가슴을 졸이고. 그렇게 하릴 없이 일주일 정도를 보냈다.

소심(小心)한 성격 탓에, 능숙하게 고래고래 소릴 지르지도 못했다. 김영수씨는 살아야하면서, 더 잃을 것도 없으면서,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우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노점상 앞을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딱하다는 듯 "그래 갖고 먹고 살겠어?"라며 혀를 찼다. 그 소리에 김영수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족들이 아직 잠든 새벽 5시에 일어나, 동네 공터로 나왔다. 손거울을 하나 들고, 크게 소리쳤다. "김영수, 넌 할 수 있다! 김영수, 넌 할 수 있다! 김영수, 넌 할 수 있다!" 마음도 매일 먹으니, 조금씩 단단해졌다. 기껏해야 "5000원이요" 정도 외치던 그가 바뀌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에겐 "예쁘다, 몇 살이니?"라며 사탕 하날 쥐어주고, 무거운 걸 들고 가는 어르신들에겐 "제가 들어드리겠다"며 싹싹하게 했다. 하나둘씩 단골이 생겼고, 구겨졌던 김영수씨 마음도 조금씩 펴졌다.

김영수씨가 흘린 땀은 정직한 보상으로 돌아왔다. 노점상(5년)서 아파트단지 내 알뜰장(1년)으로, 그리고 로드샵 2개로 확장이 됐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더 고단한 삶이었다. 진열해놓기만 하면 손님들이 다 집어가는 옷은, 소위 잘 나가는 '대박집(도매상)'에서 떼어와야했다. 그러려면 자정에 동대문으로 가야 했다. 밤 9시에 가게 문을 닫고, 쪽잠을 잔 뒤 동대문으로 향했다. 대박집 셔터가 올라가는데, 3분의 1만 열려도 사람들이 벌떼 같이 기어서 들어가곤 했다. 옷을 하나라도 더 집으려고. 물건을 다 보고 실으면 새벽 2시30분 정도. 출출하니 우동이나 떡볶이 한 그릇을 먹고, 운전해서 돌아가면 새벽 5시쯤이었다. 그러면 5시간 정도 자고, 아침 10시에 일어나 가게 문을 또 열었다. 매일 반복이었다. 빨간날에도 쉬어본 적이 없었다.

8년 동안 피땀 흘려 자리 잡은 로드샵은, 건물주 변덕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가 51세가 될 무렵이었다. 오래 정들었던 가게서 권리금 10원짜리 하나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우리 애가 여기서 카페를 운영하겠다고 한다"는 게 이유였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나가란 한 마디에 나갈 수밖에 없는 게 김영수씨는 참 억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엔 인터넷 상점의 공습이 시작됐다. 예전엔 도매꾼(도매가게 사장)들이 소매를 안하는 게 일종의 상도(商道: 장사하는 도리)였는데, 그게 무너졌다. 도매꾼 친인척들이 물건을 싸게 가져와서, 김영수씨가 도저히 팔 수 없는 가격을 인터넷에 올렸고 '대박'이 났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걷다, 옷 장사도 접었다.



57세 언저리에서 돌아보니


우여곡절 끝에 김영수씨는 동네에 작은 치킨집을 열었다. 장사 수완도 배웠고, 성실히 하는 만큼 동네 단골손님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주위에 은퇴한 직장인이 치킨집 하나를 차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 젊은 사장이 치킨집을 차렸다. 한 손님이 와서 말했다. "젊은 친구가 하는 가게는 여기보다 더 싸고 많이 주는데." 김영수씨가 가보니, 정말 그랬다. 가격을 똑같이 내렸는데도, 매출은 계속 꺾였다. 불과 200미터(m)도 안되는 상권 안에, 치킨집 세 곳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었다. 한산할 때면, 가게 앞을 지나치는 모든 손님이 다른 치킨집으로 가는 것 같아 마음을 졸였다. 한 시간이라도 가게 문을 더 열어야 했다.

버티고 버티다 결국 4년 만에 폐업 신고를 했다. 문을 열수록 적자였기 때문에. 첫째가 27살, 둘째가 25살이었다. 첫째는 취업 가시밭길을 걷고 있었고, 둘째는 대학생이었다. 그의 나이 57세,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아직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다. 자식들 학비가 끝나면 결혼 비용, 그리고 부부의 노후 준비까지. 아내에겐 우스갯소리로 "오토바이와 솜사탕 기계를 사서 솜사탕을 팔고 싶다"고 했다. 솜사탕 1개에 설탕 한 스푼인데, 원가가 1~2원이고, 1000~2000원에 팔 수 있다며. 농담이었지만, 김영수씨는 아직 경제 활동을 그만둘 생각이, 아니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가 젊었을 때까지만 해도, 75세면 호호백발 노인이 돼 세상을 떠나는 걸로 알았다. 하지만 의료 기술 발달로 '100세 시대'가 됐다. 57세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43년을 더 살아야되다니. 너무 급격한 '변화'였다. 다른 친구들이 그렇듯, 생명 연장이 축복이 아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부모를 모시고, 자식들을 부양하느라 정작 본인은 '빈껍데기'만 남았다. 60세면 이순(耳順: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순응한다, 공자)이라 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친구와 술 한 잔 하고 오던 길, 김영수씨는 서울역 지하도를 걷고 있었다. 갑자기 "꺄악" 하는 사람들 비명 소리가 들렸다. 비둘기가 낮게 '부웅' 하고 날아오고 있었다. 바닥에 사뿐히 내려 앉은 비둘기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당황한듯, 안절부절 못하고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분주히 걸었다. 사람들은 "비둘기가 여기 왜 들어왔어"하며 떠들썩했다. 하지만 정작 비둘기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지도 모르는 듯 했다. 그저 평소대로 날았을 뿐인데, 왜 주변이 이렇게 낯설어졌는지. 다들 웃는데, 김영수씨만 웃지 못했다. 그는 비둘기가 자기 처지와 같다 여겼다. 잘 알고 있던 세상인데, 갑자기 '이방인(異邦人)'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62년생 김영수[남기자의 체헐리즘]



에필로그(epilougue)

김영수씨는 오늘도 길을 나선다. 앞을 보고 걷는 것 말곤 배운 게 없었다.
굽은 허리를 다시 꼿꼿이 편다.
희끗해진 그의 머리칼 사이로 '휘익' 바람이 분다.
김영수씨를 바람이 말없이 감싸 안는다.



◇기자의 말
‘아버지 세대’ 이야길 해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일종의 대표성을 가진 '62년생 김영수'란 인물을 만들어 봤습니다.

소설이란 장르를 택한 이유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공감을 깊숙이 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흔히 '꼰대'라며 피하는, 그들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듣는다면 좀 더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소설이란 걸 써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아예 엄두조차 안 났습니다. 생각만 하고, 기사를 발제조차 못했습니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엔 이 작업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연말은 누군가를 생각하기에 좋은 시기니까요.

소설이지만, 내용은 철저히 ‘팩트’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각기 다른 5060 아버지들 네 분을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 시간만 꼬박 3일이 걸렸습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듣는 일이라, 기록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녔습니다. 장시간 동안 기꺼이 도움 주신 네 분, 다시 한 번 정말 감사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기 위한 약간의 상상력만 더해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제목은 '62년생 김영수'라고 했습니다. 한국 여성들이 겪은 차별을 기록해 공감을 이끈, 소설 '82년생 김지영' 제목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성차별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닌, 아버지 세대 '애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을 다 보셨다면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후에 어머니 세대, 청년 세대, 노인 세대 등도 소설로 계속해서 다뤄볼 계획입니다. 엄두가 안 나긴 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소설이 한 세대를 공감할 수 있는 장(場)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소설 끝에 누군가 생각난다면, 제 마음이 잘 전달된 것 같습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남형도
    남형도 human@mt.co.kr

    쓰레기를 치우는 아주머니께서 쓰레기통에 앉아 쉬시는 걸 보고 기자가 됐습니다. 시선에서 소외된 곳을 크게 떠들어 작은 변화라도 만들겠다면서요.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마음 간직하려 노력합니다. 좋은 제보 언제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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