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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향한 하나회의 폭거…서울의 봄이 짓밟힌 그날 [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 채태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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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1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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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사진=영화 '서울의 봄' 예고 영상 캡처
/사진=영화 '서울의 봄' 예고 영상 캡처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수 70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서울의 봄은 44년 전인 1979년 12월 12일에 벌어진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 소속 전두환 소장(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소장(제9보병사단장) 등이 중심이 된 하나회는 권력을 장악하고자 군사 반란에 나섰다. 하나회는 육군 내 비밀 사조직으로 육군사관학교 11기(1955년 임관) 동기 및 후배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이 사건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전까지 '12·12 사태'라고 불렸지만,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통해 쿠데타였던 것이 드러났고 이후 공식적으로 '12·12 군사 반란'으로 불리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쏘면서 유신 체제가 붕괴했다.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계엄령을 선포했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최규하는 같은 해 12월 6일 간접선거를 통해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정보 활동을 하던 대통령 경호실과 중앙정보부가 각각 사망(차지철), 체포(김재규)로 수장을 잃고 무력화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정보기관은 전두환의 국군보안사령부가 유일했다. 이에 전두환은 김재규 사건의 수사를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른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군검찰뿐 아니라 경찰, 검찰, 중앙정보부까지 모든 관련 기관을 손에 넣고 주물렀다. 강력한 권력의 맛에 취한 전두환은 중앙정부 부처의 차관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현안 보고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전두환의 만행에 정승화는 육군참모총장의 인사권을 이용,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 사령관으로 내보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관련 정보가 하나회에 들어갔고, 전두환 등은 정승화가 10·26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을 문제 삼아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뒤 군부를 장악할 하극상을 계획했다.

/사진=영화 '서울의 봄' 공식 포토
/사진=영화 '서울의 봄' 공식 포토

하나회는 1979년 12월 12일 저녁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함과 동시에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정승화를 제거하고자 움직였다. 경복궁 옆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한 하나회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병력을 보내 정승화를 제압 후 납치했다.

이와 함께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 육군참모총장 체포 행위에 대한 재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최규하는 "수사 과정에서의 단순 진술만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할 순 없다"며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먼저 상의해 볼 것"이라고 재가를 거부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공관에서 들린 총소리에 겁을 먹고 가족들과 도주한 상태였다. 쿠데타 상황에서 사실상 가장 안전한 장소인 한미연합군사령부로 피신했던 그는 뒤늦게 국방부로 돌아왔다가 반란군에게 붙잡혔다.

노재현은 하나회의 압력에 정승화 체포동의안에 서명했고, 더는 버틸 수 없음을 느낀 최규하도 육군참모총장 체포를 재가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체포동의안에 '12월 13일 오전 5시10분'이라는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이렇게 사후재가란 점을 표기해놓은 덕에 향후 문민정부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재판에서 하나회 일원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사건 이후 하나회는 대한민국 군권을 장악하며 신(新)군부 세력이 됐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구(舊)군부에 이어 대한민국이 또다시 군대 집단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거칠 것이 없어진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통해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 뒤 국회 출입을 봉쇄했다. 이때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주요 정치인을 강제로 연행하거나 가택 연금시키기도 했다. 최규하도 계속되는 신군부의 하야 압박에 같은 해 8월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1980년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취임 경축 만찬 현장 사진. /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1980년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취임 경축 만찬 현장 사진. /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최규하 하야 1개월 후인 1980년 9월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전두환은 1988년 2월까지 약 7년간 제11대, 제1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이어 전두환의 육사 동기(11기)이자 정치적 후계자인 노태우가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제13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이후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와서야 전두환, 노태우 등은 12·12 군사 반란의 주동자로 체포돼 재판받았다. 1심 선고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항소심 선고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감형됐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나왔으나 이들은 죗값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 김영삼 임기 말인 199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노태우는 추징금을 모두 납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 등 과거 행보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2021년 11월 사망하기 전까지 "난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전두환 사망 후 2년여가 지났으나 그의 유해는 아직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돼 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북녘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통일의 날을 맞고 싶다"는 사실상의 유언을 남겼다. 이에 유족들은 휴전선과 가까운 곳에 유해를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두환 유족 측은 최근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 토지를 매입해 전두환 유해를 안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사회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고, 토지주도 땅을 매매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해를 파주 지역에 안장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6일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의 한 사유지에 반대 현수막이 걸려있는 모습. /2023. 12.6. /뉴스1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유해를 파주 지역에 안장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6일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의 한 사유지에 반대 현수막이 걸려있는 모습. /2023. 12.6.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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