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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엄마 젖 빨던 아기 못 잊어"…1만5천명 앗아간 비극[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 이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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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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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제주 4·3사건 사과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YTN 뉴스 캡처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지슬 스틸컷. /사진=자파리필름
"탕, 탕, 탕"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대회가 열렸다. 모여든 사람은 3만여 명.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흉년에 식량난과 실업난이 극심하던 차 친일 경찰이 군정 경찰로 변신해 시민들 위에 군림하자 시민들은 행사를 기회로 평화 시위에 나섰을 뿐이었다.

시위대 사이에서 기마 경관의 말에 어린이가 채었다. 그러나 경관은 이를 모른 채 지나갔고 이 장면은 군중들의 분노를 끌어올렸다.

군중들이 경관을 향해 돌을 던지자 경관은 경찰서 방향으로 도망쳤다.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이 이를 보고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착각,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던 20대 여성과 가두시위를 구경하던 15살 학생도 있었다. 엄연한 과잉 대응이었다.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하자 제주도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7년 7개월간 약 1만5000명(공식집계)이 사망한 제주 4·3 사건의 발단이 됐다.




4월 3일, 남로당의 습격이 시작됐다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지슬 스틸컷. /사진=자파리필름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지슬 스틸컷. /사진=자파리필름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제주로 향했다. 친일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발포 사건 9일 뒤엔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 파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사태를 인지한 미군정은 제주도를 좌파 분자의 거점으로 규정짓고 극우 성향의 청년단체 서북청년회를 내려보내 총파업을 탄압했다. 4·3 사건이 발생한 4월 3일까지 2500여명이 감옥에 갇혔다.

4월3일 새벽, 남로당 중심 무장대 반란이 시작됐다. 350여명 무장대는 제주도 내 경찰서,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고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이 일로 군경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도 있었다. 5·10 총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려던 정부가 4월 28일 미군정과 제주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을 추진한 것. 72시간 내 전투를 중단하면 귀순자들의 신변을 보장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72시간이 다 되기 전에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평화협상은 깨졌고 전투가 재발했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무장대의 공격은 빈번해졌다. 선거 날에도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투표소를 불태우거나 담당자를 살해했다. 결국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 됐고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됐다.


9살 아이, 산모까지 죽여…무자비한 초토화 작전


올레꾼들이 4·3당시 주민들이 군경에 의해 학살 당한 곳으로 알려진 다랑쉬굴 학살터. /사진 제공=제주도
올레꾼들이 4·3당시 주민들이 군경에 의해 학살 당한 곳으로 알려진 다랑쉬굴 학살터. /사진 제공=제주도
다음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제주도 사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 이승만 정부는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제주경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송요찬은 바로 "해안선으로부터 5km 바깥에 있는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허가 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산 쪽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 거주민들은 생활 터전을 포기하고 해안으로 내려오는 게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정을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고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돌입했다. 중산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가족끼리 뺨을 때리게 하고 반항하면 총살하거나, 총살당하는 가족을 보며 박수를 치게 했다. 처형 대상이 도망가고 없을 때는 그 사람의 가족을 대신 죽이는 '대살'도 빈번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49년 1월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주민 10명이 무장대 기습으로 사망한 군인 2명의 시신을 싣고 군 본부를 찾아갔으나, 군인들은 이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북촌리까지 찾아가 460여명 주민을 모조리 총살했다. 이때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여인들도 다수 사망했다. 목격자 중 한 명은 "아기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열심히 빨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다랑쉬굴 입구에 불을 지펴 피난 중이던 주민 11명을 죽인 일도 있었다. 사망자 중 3명은 여성이었고 9살 아이도 포함됐다.


제주도민 8명 중 1명은 사라져…56년 만의 사과


제주 4·3사건 사과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YTN 뉴스 캡처
제주 4·3사건 사과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YTN 뉴스 캡처
초토화 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됐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이 기간 1만5000여명의 주민이 사망했으며 이들 중 80%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3월께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이 전개됐고 1949년 6월 무장대 상징적 존재이자 사령관이던 이덕구가 사살됐다. 무장대 활동이 급격히 약화하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5월 재선거가 치러졌고 6월에 무장대는 사실상 해체됐다. 다음 해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전국 교도소에서 학살이 벌어져 4·3 구속자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무장대가 궤멸당한 1953년에야 제주도는 안정을 찾았다. 1954년 9월 한라산 금족(禁足)령을 해제되면서 사실상 4·3 사건은 막을 내렸다. 최대 제주도민 1/8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 3만~8만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3년 다랑쉬굴이 발굴되면서 4·3 사건의 전모가 만천하에 알려졌다. 이후 7년 만인 2000년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4·3 특별법이 통과, 이법을 토대로 4·3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56년 만인 2003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에 가슴을 감추고 고통을 견뎌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됐던 잘못에 대해서도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를 드린다"고 공식 발언했다.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4·3 사건에 대해 사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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