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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국회의원이 육군장교에 '탕, 탕, 탕'…정당방위 주장했지만[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 전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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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4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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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사진=국가보훈부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사진=뉴스1
1952년 4월24일 오후 8시40분쯤. 전남 순천시의 한 음식점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독립운동가 출신 서민호 무소속 의원이 서창선 대위와 말다툼을 하다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서창선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서민호는 다음 날인 25일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서민호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경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서민호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암살에 반격한 서민호…정당방위였나



독립운동가 출신 4선 의원 서민호. /사진=국가기록원
독립운동가 출신 4선 의원 서민호. /사진=국가기록원

정황과 증언에 따르면 서민호의 총격은 정당방위였다. 당시 국회 내무위원장이던 서민호는 지방 선거를 앞두고 호남 지방을 시찰하고 있었고, 분과위원 등과 저녁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

서창선은 서민호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러다 서민호의 경호원에 발각되자 서창선은 약 5m 거리에서 권총을 뽑아 서민호를 향해 쐈다.

서창선의 저격은 경호원의 제지로 무위에 그쳤다. 서창선은 빠르게 도주했지만, 서민호는 자신이 지닌 호신용 권총으로 서창선을 사살했다. 흉부와 복부 등에 총 3발을 맞은 서창선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서창선에게 서민호 암살을 지시한 배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서민호가 1951년 2월 국군의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조사단장을 맡고 있던 만큼, 군부가 그를 벼르고 있었다는 추측만 할 뿐이다.



이승만 계엄령 선포로 재수감된 서민호


당시 사건 현장 도면. 서민호가 총을 쏘던 위치와 서창선이 죽었던 위치. /사진=동아일
당시 사건 현장 도면. 서민호가 총을 쏘던 위치와 서창선이 죽었던 위치. /사진=동아일

서민호는 그해 5월10일 살인죄로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국회가 석방 결의안을 제안, 가결시켜 나흘 만에 풀려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5월25일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재수감됐다.

당시 계엄선포의 큰 목적은 대통령직선제였지만, 서민호에 대한 사법 살인도 염두에 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민호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탓이다.

국회 속기록 등 사료에서도 이 대통령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국회가 서민호를 석방시킨 것에 분개하며 "국회가 무엇을 하자는 국회냐. 민의에 배반해 아무거나 결정하기만 하면 국회냐"며 "우리 군인 대위를 죽인 자를 가뒀더니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석방 시키면 잘했다는 말이냐"고 따졌다.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서민호를 풀어준 부산지방법원 형사부 안윤출 판사의 집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징역 8년 확정…이승만 하야와 함께 석방



이승만 대통령. /사진=국가보훈부
이승만 대통령. /사진=국가보훈부

서 의원은 영남고등군법회의에서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재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지만, 이듬해인 1953년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재판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사건은 부산지검으로 이송됐고, 검찰은 서민호에게 배임과 업무횡령 등 혐의를 추가로 적용했다.

부산지검은 1953년 10월20일 살인과 횡령은 무죄, 배임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다만 1955년 5월 항소심에서는 살인 혐의에 대해 "영남고등군법회의의 징역 8년 선고로 형이 확정됐다"며 면소 판결을 내렸다. 이미 징역 8년이 확정돼 공소권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서민호는 곧바로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서민호는 1960년 4월29일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수감 8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수감 6년 만에 또 '반공법 위반' 수감



서민호는 1966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또 한 번 고초를 겪는다. 그해 민주사회당을 창당하면서 창당 발기문에 북한 김일성과 교류 의사를 밝힌 것이 문제가 됐다.

서울지법은 서민호가 "북괴를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과 동등한 지위로 취급했다"며 징역 2년(자격정지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다만 4년 뒤 열린 항소심은 그의 발언을 정치 행위로 판단, 위법성 조각 사유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서민호는 4선 의원을 지냈으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신형식 후보에 밀려 낙선한 뒤 정계를 떠났다. 1974년 1월24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정부는 2001년 서민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공원묘원에 안장됐다가, 2004년 10월1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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