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학 '롤모델' 하버드 교수 "한국, 지금이 의과학자 키울 적기"

볼프람 고슬링 하버드-MIT 공동운영 HST 프로그램 디렉터(소장). /사진=볼프람 고슬링 교수

약 54년간 수많은 석학급 의과학자를 배출하며 명실상부 '세계 최고' 의과학자 교육기관으로 평가받는 기관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손잡고 만든 하버드-MIT 공동 의과학자 교육 프로그램 'HST(Health Science and Technology)'다.

HST는 하버드 의대에서 MD(Medical Doctor·의사 면허증)를 받는 'MD 프로그램'과 MIT 혹은 하버드대에서 의공학 및 의물리학 PhD(박사 학위)를 얻는 'MEMP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MD 프로그램 입학생은 4년에 걸쳐 필수 의학을 배우고 관련 연구를 설계·진행하며 의과학자로서의 역량을 키우게 된다.

총 30명밖에 뽑지 않는 의과학자 자리에 매년 평균 4000개의 지원서가 쏟아진다. 하버드와 MIT의 '이름값' 때문만은 아니다. 볼프람 고슬링 HST 디렉터(소장)는 지난 23일 머니투데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진짜' 연구하고 싶은 학생을 뽑고, 교수진은 학생이 연구 열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목표는 "지금껏 누구도 답하지 못한 '환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는 "미국 전체 의사 수의 약 1%에 불과한 의과학자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의과학자 키우는 교육 "양보다는 질, 특혜 아닌 멘토십"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하버드대 의대 전경. /사진=위키미디어

고슬링 소장은 종양학자이자 소화기내과 전문의다. 독일에서 비텐·헤어덱케 의대를 졸업했다. 연구하기 좋은 교육 환경을 찾던 끝에, 미국으로 건너와 하버드 의대와 연계된 미국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BWH)에서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았다. "세부 전공을 선택하기까지 여러 분야를 탐색할 시간을 주고, 이후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었다.전공을 먼저 정한 뒤 연구해야 하는 독일과는 반대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간과 관련 질환을 연구하는 의과학자가 됐다.


학생에게 충분한 연구 기회를 주는 교육과정은 여전히 HST의 핵심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양보다는 질'에 방점을 둬야 한다. 고슬링 소장은 "HST는 (하버드 의대 타 프로그램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다"고 말했다. MD 프로그램 정원은 고작 30명이다. MEMP 프로그램 20명을 더해도 한 수업의 인원이 50명 남짓이다. 고슬링 소장은 "덕분에 학생 수 대비 교수 인력이 모자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입학생들은 2년에 걸쳐 학생들은 해부학, 병리학, 유전학, 면역학, 뇌과학, 소화기병학 등 기초 의학을 배운다. 이 과정에서만 50~60명 교수들의 지도를 받는다. 3·4년 차에 접어들면 임상 수련을 시작하고, 이때 박사 과정으로 이어지는 교육 과정을 받는다. 임상 교수진도 수십 명에 달한다. 고슬링 소장은 "하버드에만 600명에 달하는 과학 분야 교수진이 있고, MIT도 마찬가지"라며 "HST 소속 학생들은 이론적으로 수백 명의 교수진을 두고 선택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교수가 학생 연구를 밀착 지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고슬링 소장은 "의학 연구에 품을 뜻고 온 학생이라도 교육 과정을 거치며 임상의나 제약회사를 선택할 수도 있다"며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럼에도 학생이 연구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도록 그들을 가르치는 게 교수진의 올바른 '멘토십(mentorship)'"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던 경험을 돌아보면, 학생들이 연구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도록 했던 건 장학금 등 '특혜'가 아니었다"며 "학생이 연구계에 머무를 수 있도록 장려하는 행위, 즉 '적재적소에 도움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멘토가 존재하는가'에 달려 있었다"고 덧붙였다.

HST 프로그램에서 MD 과정을 수강하는 학생을 위한 커리큘럼표. /사진=HST 홈페이지

'선언'에 그친 의과학자 육성책…고슬링 "한국의 영향력 높일 시기, 바로 지금"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충북 청주시 청원구 동부창고 6동 이벤트홀에서 ‘첨단바이오 중심에 서다, 충북’을 주제로 열린 스물네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HST는 국내에서도 의과학자 육성을 얘기할 때 대표적인 '롤모델'로 등장한다. 작년 봄 미국 보스턴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MIT와 하버드를 중심으로 구축된 세계적인 바이오 단지 '보스턴 클러스터'의 석학들을 만났다. HST의 MIT 측 소장인 콜린 스털츠 교수도 그 자리에 있었다. 2개월여 흘러 지난해 6월, 정부는 '전주기 의과학자 양성 추진안'을 담은 '디지털 바이오 인프라 조성방안'을 발표했다. HST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소개했다.

이달 25일 대통령 직속 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첨단바이오 이니셔티브'는 디지털 바이오를 국가 주력 분야로 육성하고, 이를 위해 첨단바이오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기반 구축 과제로는 또다시 '의과학자 양성'이 포함됐다. 하지만 지난해 발표에서 한 발짝 진전된 내용을 찾기는 어려웠다.

고슬링 교수는 지난해 가을, 대전 KAIST(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을 비롯해 한국의 몇몇 병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에서도 한국에 엄청난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며 "한국이 의학 및 과학 연구에 투자를 늘려 영향력을 높일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