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아동 성범죄, 2차 피해 방지 위한 언론의 역할은?

(서울=뉴스1) 염지은 기자 =

여성가족부와 한국기자협회가 27일 제주 서귀포 칼(KAL) 호텔에서 개최한 '언론에 비춰진 아동·여성 성범죄' 세미나에서 정혜선 변호사(사진 왼족)와 김재련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장(사진 가운데)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News1

성폭행 피해자들은 성폭행 사실 자체 뿐 아니라 수사 및 재판 과정과 언론의 보도로 인한 2차 피해로 더욱 심각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진술뿐인 부족한 객관적 증거로 인해 피해자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추궁성 질문을 받기도 하고 가해자의 집요한 부인으로 인해 더욱 가슴 아파한다.


특히 신원과 사생활이 공개되고 선정적이고 흥미 위주로 접근된 보도는 피해자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여성가족부(장관 김희정)와 한국기자협회(회장 박종률)가 27일 오후 제주 서귀포 칼(KAL) 호텔에서 한국기자협회 소속 전국 언론사 기자 70여 명을 초청해 개최한 '언론에 비춰진 아동·여성 성범죄' 세미나에선 성범죄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바람직한 보도 방향이 모색됐다.

세미나 주제 발표에는 성폭력 피해자 무료 변론을 해온 정혜선 변호사(법무법인 이산)와 인권 변호사 출신의 여성가족부 김재련 권익증진국장이 나서 '성폭력 보도사례와 법적 책임', '2차 피해 예방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 "피해자의 얼굴·이름·거주지 등 비공개는 법적 의무"

첫 번째 주제 발표자로 나선 정혜선 변호사는 피해자의 ▲신원 노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보호 ▲피해자 측에 범죄 발생 책임 추궁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 ▲잘못된 통념에 기초한 보도 등의 문제점을 '나주 고종석 사건', '윤창중 사건', '조두순 사건' 등을 들어 설명했다.

성폭력 2차 피해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무엇보다 '신원 노출'이 지적됐다.

정 변호사는 "피해자의 얼굴, 이름, 거주지 등을 직접 공개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법적 의무다"며 "피해자의 거주지, 직업 나이, 범죄 발생 장소, 가해자와의 관계, 주변인 인터뷰 등 간접 정보들의 조합을 통해 피해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2년 나주 고종석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집 위치, 집 내·외부, 피해자의 상해 흔적, 그림 일기장 등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 재판부는 "설령 공개된 사항들이 일반 대중의 정당한 관심사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관심이 피해자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라는 인격적 이익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없다"며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2011년 명문 대학생 성추행 사건의 경우, 피고인에 대한 형사절차 진행 중에 피고인측 가족으로부터 수사기록 등을 제공받아 피고인의 주장이 전부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 언론사에 대해 법원은 벌금 1000만원의 형사처벌과 3000만원의 민사상 손해배상을 판결했다.

정 변호사는 "피해자의 직업, 평소 행동이나 성향, 음주 여부, 옷차림 등 성폭력 사건과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내용에 대해 언급,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의 보도를 해서는 안된다"며 "피해자의 어떤 상태 때문에 범죄가 일어났나는 식의 표현은 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주 고종석 사건의 경우 마치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범죄가 발생한 것처럼 보도한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머니에게 더욱 상처를 줄 수 있고 아이가 커서 기사를 보고 부모를 원망할 수 있으므로 주의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가해자의 범행 수법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도 삼가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성폭력은 극복할 수 없는 피해라는 잘목된 통념을 심어줄 수 있고 피해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키고 성적 수치심을 재경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자인 아동·청소년을 성적 대상으로 대하는 장면의 재연이나 영상 보도는 삼가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가해자의 사이코패스 성향을 부각하는 것도 대중에게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잔인성, 무자비함을 보여야 성폭력이라는 그릇된 인식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평범한 가해자들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성폭력'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외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 변호사는 "경쟁적인 취재나 보도 과정에서 정작 보호돼야 할 성폭력 피해자들이 소외되고 언론이 오히려 2차 피해를 줄 수 있음을 상기해 달라"며 "성폭력 피해 회복, 치유 과정, 성폭력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 및 제도 개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보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 "피해자 심리상태에 대한 공감이 전제돼야"

두 번째 주제 발표자로 나선 김재련 여성가족부 권익지원국장은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 ▲성폭력 범죄에 대한 편견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등을 설명했다.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전제로 통념을 뛰어넘은 언론의 역할을 당부했다.

김 국장은 "성폭력 사건의 경우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보호법익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며 "물리적인 행사가 있거나 상처가 있거나 피해자의 저항을 억압해야 성폭력 범죄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거부 의사를 무시한 접촉 행위만으로도 성폭력 범죄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치 않는 성적 접촉 거부 의사를 무시한 행위는 사회·경제·권력적 지위 차이로 거부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이며 진술 외에 증거가 없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 성폭력 사건에 있어 "아버지가 딸을, 교사가 제자를, 여러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추행을, 30대 남성이 60대 여성을 성폭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식의 상식을 논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피해자는 오랜 기간 당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가 돼야 문제 제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 뒤늦게 고소한 것만으로도 불안한데,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면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며 "언론이 갖고 있는 평균적 상식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으로 연결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또 "30대 간호사가 60대 환자를 성폭한 사건의 경우 주변사람들이 오히려 피해자에 대해 돈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 결국 피해자가 자살하고 말았다"고 예를 들며 "평균적 상식의 틀에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지 말고 상식을 뛰어 넘어 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특히 김국장은 "취재·인터뷰를 할 때 증거가 없어 믿을 수 없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며 "술에 취한 상태 등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성폭력 피해는 저항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외상도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객관적 증거가 곧 피해자의 진술이라는 인식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피해자의 심리상태에 대한 공감이 전제돼야 한다"며 독일의 사례를 예로 들기도 했다. "독일의 경우 성폭력 피해자 뿐 아니라 아동·청소년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을때 아동·청소년에 대한 질문 권한은 재판장에게만 있다. 피고인과 변호사는 판사를 통해서만 팩트 위주로 질문할 수 있다"며 "그런 부분은 우리도 보완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언론이 목소리를 내야할 부분도 제시됐다. 김국장은 "피해자의 옷차림이 아니라 가로등조차 없는 밤길을 중요하게 보도해 가로등을 설치하게끔 하는 등 신변잡기적 충족을 위한 위한 부분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 대해 조심하고 목소리를 내줘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 국장은 최근 40대 중년 남성의 10대 학생 강간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는 "외국의 경우 3살 이상만 차이가 나면 의제 강간으로 인정하고 있는 있으나 우리는 법적으로 의제강간(강간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13세 미만 아동으로 돼 있어 15세 청소년이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하면 현행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며 "입법 의지의 문제인 것 같다. 의제강간의 연령을 높일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성폭력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해 양가감정(兩價感情·상호 대립되거나 상호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고 문자로도 표현되는데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간다"며 "오랫동안 성폭력에 노출되다 보면 살아남아야겠다,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강요된 적응증상을 보이게 된다"고도 설명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 주제 발표에 이어서는 MBC 기자 출신의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 팀장(사장)이 초청돼 '언론계 선배와의 대화' 시간을 갖고 신뢰를 핵심 가치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강의했다.

또 권용현 여성가족부 차관이 참석, 인사말을 통해 "국민에 대한 안전은 국가가 지속 성장하는데 있어 필수 불가결하다"며 "성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 가해자 처벌에 있어 전력질주를 하고 있지만 정부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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