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욕했으면"…2시간 생떼에도 전화 못 끊는 콜 상담원들

지난 9월6일 대구 남구청 관계자들이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 콜센터에서 전화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사진제공=뉴스1

"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5~30통씩 전화하는 사람이 있어요. 전화해서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해도 먼저 끊을 수가 없어요. 그분은 지킬 건 다 지키거든요."

정부민원콜센터에서 5년차 상담원으로 일한 석모씨(43)는 '악성 민원인'으로 통하는 A씨 전화를 많게는 하루 2통 받는다. 전화가 연결되면 A씨는 "직접 공공기관에 내 전화를 연결해달라"고 요구한다. 석씨가 '정부민원콜센터는 민원을 접수하는 곳이지 전화를 연결해주는 곳이 아니다'란 취지로 안내하면 돌아오는 건 "연결해줄 때까지 끊지 않겠다"는 대답이다.


똑같은 민원이 4년째 이어지는 동안 석씨는 단 한 번도 먼저 A씨 전화를 끊은 적이 없다. A씨가 욕설·성희롱 등 통화 종료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적이 없어서다. 석씨는 "A씨의 경우 존댓말까지 꼬박꼬박 쓴다"며 "통화 종료 규정을 저희만큼 잘 아는 분일 것"이라 했다.
"먼저 못 끊어 약 2시간 통화"...'정중한 괴롭힘' 비일비재콜센터 노동자들은 회사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통화 종료 규정을 두고 있지만 규정의 사각지대에서 '정중한 괴롭힘'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입을 모았다. 욕설·성희롱·고성만 '상담원이 먼저 끊을 수 있는 경우'로 규정하고 있어 고객의 무리한 요구에도 통화를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어서다.

유명 배달대행업체 콜센터에서 지난해 10월부터 근무 중인 황모씨(28)도 석씨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황씨는 "회사 규정을 문제 삼으며 상급자와의 통화를 요구하는 고객이 있었는데 오후 5시에 시작한 통화가 오후 6시 40분까지 이어졌다"며 "퇴근 시간 넘어서까지 하소연을 듣고 있자니 '욕을 듣고 끊어버리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털어놨다.

대형 은행 콜센터에서 6년간 일한 김모씨(44) 역시 업무 중 '정중한 괴롭힘'을 경험했다. 은행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 대해 설명하던 김씨에게 한 고객은 대뜸 "상담원 자질이 없는 목소리"라는 등 인신공격성 발언을 했다.


김씨는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 손까지 덜덜 떨렸던 기억이 난다"며 "억지로 전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나중에 B씨가 전화를 먼저 끊어줘서 오히려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통화 종료 규정'의 사각지대…"산업안전보건법 개정 필요"

민주노총 콜센터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 6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스 빌딩 앞에서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는 콜센터 노동자 행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스1

고객들의 '정중한 괴롭힘'이 이어지는 이유는 통화 종료 규정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제41조는 콜센터 노동자가 폭언 등을 들었을 때 사업자가 업무를 일시 중단하는 등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다수 콜센터는 '고객이 욕설·성희롱 등을 할 시 경고 후 끊을 수 있다'는 내부 규정을 마련하고 있지만, 욕설·성희롱·고성·반말 없이 상담원을 괴롭히는 사례에 대해선 특별한 지침을 두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콜센터 노동자가 상담 내용을 판단해 통화 종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회사 내부 규정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씨는 "대부분 회사는 고객과 대화한 내용을 모두 녹음하기 때문에 추후 상담원의 통화 종료 조치가 적절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며 "회사가 상담원을 믿고 통화를 먼저 끊을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중한 괴롭힘'도 엄연한 폭력이라며 상담원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선 산안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다른 상담을 못 하게 하는 등 상담원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폭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며 "지능적인 언어폭력의 경우 신체 폭력보다 심리적 영향이 더 오래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광훈 노무법인 '신영' 공인노무사는 "건강 장해를 유발하는 등 행위가 발생했을 때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업무를 중단할 수 있게끔 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또 아주 세부적이진 않더라도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를 지금보다 다양하게 인정하는 게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