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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한 팔찌 보고 웃은 佛 친구…'라이시테'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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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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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7.3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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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라이시테 ①] 핵심 정체성 '라이시테'… 공적인 자리서 종교 드러내는 것 엄격 금지

[편집자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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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 /AFPBBNews=뉴스1
힙한 팔찌 보고 웃은 佛 친구…'라이시테' 때문이라고?
수년 전 여름, 한창 멋 부리기에 관심 많던 때의 이야기다. SPA 브랜드 숍에서 산 예수 성화 팔찌를 왼팔에 끼고, 오른팔엔 불교식 염주를 찼다. 그때나 지금이나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그냥 예뻐서 구입했고, 예뻐서 착용했다.

젤네일도 받고 양 팔에 찬 팔찌까지 예뻐서 맘에 들던 찰나,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인 친구가 내 심기를 건드렸다. "한국에선 이런 팔찌를 다들 차나? 종교 국가인가? 아무튼 특이하네"라는 것이다. 당황한 내가 "음, 무교인데 그냥 예뻐서 찼어"라고 답하자 그는 깜짝 놀라면서 "굳이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다고? 새롭네"라고 답했다.

이 일은 내 뇌리에 한참 남았다. '뭐가 특이하지? 착용할 의무가 없는데 '굳이' (사회적 편견 감내하며) 착용한다는 식의 발언은 왜 나온 거지? 프랑스도 가톨릭 성향이 강한 나라 아니었나' 등의 생각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
부르카(왼쪽), 니캅 /사진=위키커먼스, 픽사베이
부르카(왼쪽), 니캅 /사진=위키커먼스, 픽사베이
그 사이 프랑스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2011년 4월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이슬람 베일(니캅·부르카) 착용이 금지됐으며, 2015년 30여개 지방자치단체가 공공질서 위협, 수상안전 등을 이유로 해변가에서 부르키니(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의 착용을 금지했다. 그런가 하면 2016년 8월 프랑스 최고 행정재판소 국사원(Conseil d'Etat)은 부르키니 착용 금지가 개인의 자유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라며 무효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굵직한 이슈들이 국제면을 장식하는 사이 주변에선 '프랑스가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개중엔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똘레랑스(tolérance·관용, 이해)와 싸데팡(Ça dépend·'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뜻으로 프랑스 특유의 포용력을 상징하는 말)의 나라, 프랑스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며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팔찌에 대한 친구의 반응이, 프랑스발 국제뉴스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 '라이시테'(laïcité) 개념을 알게 돼서다. 그는 "그러고보면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 중에 십자가 액세서리나 묵주 반지, 아니면 무슬림 상징물을 차거나 갖고 다니던 친구들이 없었던 것 같애. 라이시테 때문인가"라고 말했다.
튀니지 해변에서 튀니지 무슬림 여성이 부르키니를 입고 놀고 있다(위), 부르키니 모델 /AFPBBNews=뉴스1
튀니지 해변에서 튀니지 무슬림 여성이 부르키니를 입고 놀고 있다(위), 부르키니 모델 /AFPBBNews=뉴스1
프랑스인들이 자유, 평등, 박애에 이어 프랑스의 핵심적 국가 정체성으로 꼽는 '라이시테.' 라이시테는 여러 프랑스적 함의가 담긴 말로 한국말로 번역하기 꽤나 까다로운 개념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세속성' 또는 '비종교성' 정도로 거칠게 설명할 수 있겠다.

'라이시테'는 1905년 제정된 제3공화국 '정교분리법안'과 1937년 제정된 '학교에서 종교적 상징을 금지하는 법'에 근거하는데, 공적인 장소에서 종교를 드러내는 걸 엄격히 금지한다.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이든, 종교를 가질 자유를 허용하지만 동시에 종교로부터의 자유 또한 허용한다. 즉 종교가 세속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종교에 대한 포용성이 꽤나 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겐 왜 프랑스인들이 종교를 공적인 자리에서 숨기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프랑스의 종교적·문화적·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본래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가톨릭의 맏딸'로 불렸다. 5세기 프랑크족의 초대 왕 클로비스 1세가 정통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프랑스는 공식적인 가톨릭 국가가 됐다. 이 같은 흐름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탈 가톨릭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이어졌고, 가톨릭은 프랑스 민족이 공유하는 가치로 여겨졌다.

균열이 생긴 건 16세기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18세기 중반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다. 프랑스 남부에는 가톨릭(구교)에 저항하는 신교도들(위그노·Huguenot)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상공업에 종사하며 점점 세력을 키워나가자 가톨릭 세력과 싸움이 벌어졌다. 바로 위그노 전쟁(1562~1598년)이다.
가톨릭 신자 '마고 공주'(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앙리 4세의 왕비)가 성 바르텔레미 학살 당시 가톨릭 신자들에게 쫓기던 신교도 '라 몰'을 구해주는 장면. /사진=영화 '여왕 마고' 스틸컷 중.
가톨릭 신자 '마고 공주'(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앙리 4세의 왕비)가 성 바르텔레미 학살 당시 가톨릭 신자들에게 쫓기던 신교도 '라 몰'을 구해주는 장면. /사진=영화 '여왕 마고' 스틸컷 중.
지난했던 위그노 전쟁 기간, 수만명의 위그노가 학살된 '성 바르텔레미 학살'(1572년)을 포함, 수많은 위그노가 희생됐다. 36년간 지속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던 이 종교내전은 위그노들의 지도자 격이던 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 1598년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을 내리며 종결됐다.

하지만 동등한 승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가톨릭은 주류 종교였으며, 프랑스 왕조의 정치적 계산식에 따라 위그노는 안전했다가 위기 국면에 처했다가를 반복했다. 훗날 가톨릭 신자들은 1685년 신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해 루이14세를 압박해 '낭트칙령 폐지'에 해당하는 퐁텐블로 칙령(The Edict of Fontainebleau)을 내리게 했다. 신교의 전면적 금지, 신교 예배처 파괴, 신교 목사 추방 등을 담은 칙령이다. 이로써 20만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인접국으로 이탈하게 됐다. 기술과 부를 가진 상공인 위그노들이 다수 빠져나가면서 프랑스는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연이은 종교 관련 분쟁으로 사회적 갈등과 피로감이 높아질 때쯤, 한 방이 등장했다. 18세기 중반 볼테르, 샤를 드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등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당시는 상업자본주의의 발달로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피지배 평민계층의 비판의식이 한껏 고조된 때이기도 했다. 이들의 주도로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부패한 왕실과 항상 연합했던 가톨릭 교회는 대혁명 과정 가장 큰 타도 대상이 됐다.

1789년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탈가톨릭 절차를 하나씩 밟아갔다. 1789년 국민의회는 국가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했다. 1791년에는 신성모독죄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가능케 했다. 이어 1792년에는 가톨릭 교회가 국가 대신 해오던 행정적 절차들(호적 등록과 보관, 이혼 절차, 결혼식과 장례식 집전 등)을 행정부로 이전했다.

이 과정 권력을 장악한 로베스피에르가 1790년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가톨릭 이외 모든 종교를 박해한 사건은 탈가톨릭 가속화에 힘을 더했다. 대혁명이 프랑스 공화국 정부에는 탈가톨릭화를, 신교와 유대교 신자에게는 해방의 선언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런 흐름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제3공화정 초기 페리법(1881~1882) 제정을 낳았다.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맡아온 교육도 이제는 국가가 설립한 공립 학교만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쥘 페리 총리는 아이들이 '의무·무상·비종교(라이시테)'의 교육을 받을 때만 프랑스가 민주 공화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제 종교는 교육도, 행정도, 사회사업도 주도적으로 할 수 없는 위치가 된 것이다.

여기에 드레퓌스 사건(1898~1906년)까지 더해지면서 프랑스 공화국은 라이시테를 법으로까지 제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유대인 출신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간첩죄를 둘러싸고 프랑스는 반으로 쪼개졌다. 독일과의 전쟁(1870~1871년) 이후 민족주의가 고취되던 당시, 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제공했다는 게 이유였다. 좌파 정치인들은 민족주의로 인한 반유대주의적·반유대교적 편견이라면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반면 군부·교회·온건 공화주의자들(우파)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다.
드레퓌스 대위 /사진=위키커먼스
드레퓌스 대위 /사진=위키커먼스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지목되며 사건이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군부가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몰고 사건을 은폐하려했던 게 밝혀졌다. 드레퓌스 가족도 적극적으로 재심을 요청하고, 여기에 좌파 지식인 에밀 졸라가 사설 '나는 고발한다'를 쓰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끝내 1906년 최고법원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선언하면서 급진 공화파(좌파)가 승리했다. 이 사건은 반드레퓌스파에 속했던 가톨릭과 우파 세력이 몰락하고 좌파 세력 중심으로 프랑스 공화정의 세력을 차지하는 사건이 됐다. 동시에 정치에 종교를 기반으로 한 편견이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라이시테적 생각을 강화했다.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멈추고 국가가 화합할 수 있도록. 주류 세력인 가톨릭이 다시는 정치를 휘둘거나 비가톨릭 국민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모든 국민이 법 아래 평등할 수 있도록 1905년 세속주의 정신을 담아 정교분리법이 제정됐다.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엄격한 분리(라이시테)를 선언함으로써, 이 법에 따라 프랑스는 어떤 종교도 국교로 인정하지 않고, 어떤 종교에도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 국가가 됐다. 공적인 자리에서 종교성을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프랑스의 저명한 종교사회학자 장 보베로는 라이시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에서 가톨릭은 자신이 유일하게 보편적 진리를 담보한다고 생각해 타 종교에 배타적이었다. 결국 종교의 자유와 시민종교를 공존시키기 위해서 시민 다수가 믿는 '가톨릭 교회'를 추방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프랑스는 다양한 시도, 갈등, 타협 끝에 라이시테라는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참고문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지성공간,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유럽의 나르시시스트 프랑스, 민연, 이선주
'2004년 법'과 프랑스 라이시테 원칙 적용의 문제점, 유럽연구 제32권, 박선희
종교적 중립성에 관한 고찰, 경북대 법학연구원 법학논고 제41집, 전훈
샤를리엡도 사건과 프랑스 내 소수자들, 이주사학회, 박단
여전히 지속되는 라이시테를 둘러싼 갈등, 이주사학회, 박단
공화주의적 통합과 프랑스 민주주의, 홍태영

추천영화
여왕 마고, 영화 초반부의 '성 바르텔레미 학살' 장면을 비롯해 가톨릭과 신교가 대립하던 끔찍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라이시테 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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