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소년' 된 러시아…"군사활동 줄이겠다"는데 믿어도 될까

[모스크바=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열린 크름반도(크림반도) 합병 8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를 대량학살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2022.03.19.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5차 평화협상에서 러시아가 군사 활동을 축소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말이 아닌 행동을 지켜볼 것"이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가 지금까지 수차례 거짓말과 '가짜 깃발 작전'(false flag operation) 자작극을 반복해온 만큼, 러시아의 이번 행보도 또 하나의 '전술'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9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날 협상 이후 러시아 측은 "키이우(키예프)와 체르니히우에서 군사 활동을 대폭 줄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같은 러시아의 발표와 관련해 "지켜보겠다. 그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볼 때까지 어떤 것도 예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 커비 미국 국방부 대변인도 일부 러시아군이 실제 키이우에서 이동했지만 철수가 아닌 '재배치' 차원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크렘린궁의 발표에 속아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미콜라이우=AP/뉴시스] 2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 주 정부청사가 러시아의 공격으로 파손돼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남부 도시 미콜라이우 주 정부청사가 미사일 공격을 받아 7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2022.03.30.

러시아는 군사 활동을 줄이겠다고 밝힌 이날에도 공격을 이어갔다. 커비 대변인도 이 점을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국가비상서비스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러시아의 폭격에 남서부 미콜라이우 정부 건물 절반이 무너졌다. 사망자 최소 12명, 부상자 33명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CNN은 이날 키이우 외곽 이르핀시에서 5km가량 떨어진 동부 주택가에서 폭발음이 수차례 들렸다고 전했다.
"침공 절대 없을 것", "국경지대 병력 철수" 주장 모두 거짓말

러시아 외무부 웹사이트에 올라와있는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의 2월 16일(현지시간) 브리핑 내용.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는다"로 시작하고 있다./사진=러시아 외무부 캡처

러시아는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기 전부터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연막 전술'을 펼쳤다. 특히 지난달 중순 즈음 우크라이나 침공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대외적 메시지를 잇따라 발신했다.

지난달 15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전쟁이 아닌 타협을 원한다"며 "국경지대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루 뒤인 16일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서방의 우크라이나 공습 관련 얘기는 고양이가 웃을 일"이라면서 "(서방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또 미디어를 통해 '정보 테러'를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국방부는 일부 부대의 철군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다음 날인 지난달 17일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의 긴장 완화를 위해선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무기 공급이 중단돼야 하며 이미 전달된 무기는 철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2월16일 러시아 국영통신사가 공개한 러시아군 일부 병력의 철수 모습. /사진=트위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20일이다. 러시아의 동맹국인 벨라루스는 "돈바스(도네츠크·루간스크) 지역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에서 진행 중인 합동훈련을 무기한 연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합동훈련 연장이 크렘린궁의 표현인 '돈바스 해방을 위한 특별 군사작전'과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에 대한 침공이 됐다.

미국은 러시아의 주장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이 철군을 언급할때, 백악관은 철군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국경 지대 병력이 늘었다고 반박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할 구실을 찾기 위해 '가짜 깃발'로 자작극을 벌일 수 있다는 서방의 분석은 적중했다. 가짜깃발 작전은 상대가 먼저 공격한 것처럼 꾸며 상대를 공격할 빌미를 조작해내는 군사적 수법을 의미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기 전에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은 "돈바스 지역의 무력 갈등은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는 구실을 만들려는 노골적인 시도"라며 "크렘린궁의 대본에서 나온 자작극"이라고 말했다. 당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러시아가 곧 우크라이나 내 자국민 또는 러시아 민족을 보호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포고문을 내고 실제 공격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돈바스만 집중하겠다" vs 서방 "눈속임, 시간벌기"

28일(현지시간)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 탈바꿈한 다목적 실내 경기장인 Hala Orbita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C) 로이터=뉴스1

지난 25일(현지시간) 세르게이 루드스코이 러시아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은 "군사작전 첫 번째 목표는 거의 달성됐다"며 "앞으로 동부 돈바스 지역의 완전한 해방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돈바스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 대한 공격은 줄어들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를 두고 러시아의 '출구 전략'인지 아니면 '연막 작전'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침공 한 달이 넘도록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러시아군이 퇴로의 명분을 마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군이 장악한 동부 지역을 확실히 손에 넣고 발을 빼는 전략을 선택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도 돈바스를 제외한 지역에서 러시아의 공격이 계속 이뤄지고 있는 만큼, 러시아가 "돈바스에만 집중하겠다"며 국제사회의 눈을 속인 뒤 시간 벌기에 나섰다는 분석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서방을 교란시키며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의미다. 이와 관련 스티븐 비들 컬럼비아대 교수는 "러시아는 돈바스 지역에 중심을 두고 병력을 재편성한 뒤, 이곳을 추후 공격을 확대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 역시 종전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발표를 '믿을 수 없는 거짓말'로 일축했다. 마르키안 루브키우스키 우크라이나 국방장관 비서관은 영국 BBC방송에 "우리는 러시아의 목표가 여전히 우크라이나 전역 점령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美 "러, 생화학 무기 관련 '가짜 깃발 작전' 쓰는중"

[워싱턴=AP/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와의 회담 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의 군사 활동 축소 발표에 대한 기자 질문에 "말이 아닌 행동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2022.03.30.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1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생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며 "이는 그(푸틴 대통령)가 둘 다(화학·생물학 무기)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명확한 징후"라고 했다. 가짜깃발 작전이라는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면서 "(러시아는) 미국이 유럽에 화학 무기와 생물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새로운 가짜 깃발 작전을 얘기하고 있다"면서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