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콜 화형식' 이건희 소환한 GS건설…'전면 재시공' 결단 배경은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열린 '애니콜 화형식'

#. 1995년 3월9일. 삼성전자 경북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삼성전자 직원 2000여명이 '품질확보'가 새겨진 머리띠를 두르고 모였다.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운동장 한가운데 '애니콜' 휴대폰 15만대가 쌓여있었다. 직원들은 휴대폰을 부수고 불을 붙였다.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앞서가던 모토로라를 잡기 위해 무리하게 휴대폰을 생산했다. 그 결과 불량률은 최고 11.8%까지 치솟았다. 고객들의 원성이 커졌다. 삼성전자와 애니콜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꺼낸 초강수가 화형식이다. 이 사건은 훗날 삼성전자가 '갤럭시 신화'를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

#. 2023년 7월5일. GS건설은 지난 4월말 주차장 붕괴사고가 일어난 인천 검단신도시안단테 아파트 단지 전체(1666세대)를 전면 재시공하겠다고 밝혔다. 철거 후 재시공까지 5년 이상 더 걸리고, GS건설이 감당할 비용은 수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국토교통부 건설사고조사위원회의 사고조사 결과발표 직후 내린 GS건설의 결단이다. 국토부는 설계, 감리, 시공 등 여러 단계의 문제가 겹쳐 이번 사고가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이중 시공을 맡은 GS건설은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대신 책임을 떠안기로 했다. 재무적 부담을 안아가며 '초강수'를 택한 것이다.


GS건설 (15,840원 ▲70 +0.44%)은 검단 아파트 전면 재시공 방침을 밝히면서 이건희 회장의 '애니콜 화형식'을 거론했다. GS건설은 사과문 말미에 "마지막으로 저희는 자이 브랜드의 신뢰와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과거 자사 불량제품 전체를 불태운 경영자의 마음으로 입주자들의 여론을 반영해 검단 단지 전체를 전면 재시공하고 입주지연에 따른 모든 보상을 다 할 것"이라며 "저희 임직원 모두가 이 과정을 통해 자세를 가다듬고 진정으로 사랑받는 자이 브랜드로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한다"고 했다. '자사 불량제품 전체를 불태운 경영자'는 이건희 회장을 지칭한다.

GS건설 관계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애니콜 휴대폰 초창기 모델의 품질이 안좋아 평판이 나빠졌을 때 싹 다 수거해서 불지른적이 있다"며 "그다음에 애니콜이 (시장점유율) 1등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GS건설도 이번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쇄신의 기회로 삼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라며 "경영진이 눈앞에 한두수를 넘어 수많은 수를 보고 복합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GS건설은 이날 출입기자들에게 두차례에 걸쳐 사과문을 발송했다. '전면 재시공' 내용은 오전 11시20분쯤 발송한 첫 사과문에는 없었다. '초안'에서 GS건설은 콘크리트 강도 관련 "만일 안전에 문제가 된다면 그것이 어디까지가 됐건 최대한 재시공 범위를 충분히 넓혀서 안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제거토록 하겠다"고 했다. 이 내용은 2시간쯤 뒤 다시 보낸 사과문에서 '전면 재시공'으로 교체됐다. '애니콜 화형식'도 새 사과문에 추가된 내용이다. 그사이 경영진이 급박하게 내린 결정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올들어 GS건설의 '자이' 브랜드는 수난을 겪고 있다. 검단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사고 뿐만 아니라 서울역센트럴자이 기둥균열, 개포자이와 평택지제역자이의 주차장 침수 등 사건사고가 잇달았다. 국내 건설사 최상위권이었던 브랜드 이미지는 바닥을 향하고 있다. 1994년~1995년 당시 '애니콜'이 겪은 상황과 비슷하다.

아파트 건설 하자는 안전, 즉 고객의 생명이 직결된 문제다. 브랜드 이미지가 회복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검단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가 전국민이 관심을 갖는 이슈가 된만큼, '품질개선'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수천억원의 추가비용은 감수할만하다는 판단을 경영진이 내린 것이다.

더불어 '재시공 범위'를 둔 논란이 길어질수록 GS건설의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한다는 점을 감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냐를 두고 논란이 되고 GS건설이 언급되는 자체가 브랜드 이미지에 부담이다.

국토부는 사고조사위원회가 제출한 최종 보고서와 관계 법령을 검토해 다음 달 중 GS건설과 LH(한국토지주택공사) 등 관련 기관에 대해 징계 수위와 재발 방지 대책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향후 국토부 징계 등에 따라 등떠밀려 전면 재시공을 하게 되는 상황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GS건설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을 이어가면서 이미지와 실속 모두 잃는 상황을 기다리는 대신, 선제적 조치로 불확실성을 제거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단기적인 재무적 손실 규모가 막대해지더라도 전면 재시공을 하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쇄신의지를 보여주며 이미지를 개선하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천=뉴스1) 정진욱 기자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2일 인천시 서구 검단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 슬래브 붕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2023.5.2/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