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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80조원은 돈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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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3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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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의 思見]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
삼성전자 3나노 파운드리 양산에 참여한 파운드리사업부, 반도체연구소, 글로벌 제조&인프라총괄 주역들이 손가락으로 3을 가리키며 3나노 파운드리 양산을 축하하고 있다./사진제공=삼성전자
지난해말 기준 삼성전자의 통장 잔고(순현금)는 약 80조원(79조 6900여억원)이다.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등 약 92조원에서 차입금 약 12조를 뺀 금액이다. 이는 직전해(2022년말)의 순현금 104조 8900억원보다 24%(25조 2000억원) 줄어든 규모다.

혹자는 80조원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주주들에게 배당도 듬뿍하고, 자사주도 대규모로 사들여서 소각을 해 기업의 가치를 높이라고 말한다. 배당을 늘리면 주식을 사려는 수요가 늘어나니 주가가 오를테고,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면 유통주식수가 줄어드니 1주당 가치가 올라가 '레벨업'된다고 주장한다.


2015년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하고 그 이듬해 타깃을 삼성전자로 바꿔 기업분할과 30조원에 달하는 특별배당을 요구한 그 때와 비슷한 양상이다.

당시 엘리엇에 몸담았던 인물들이 최근에는 새 이름의 펀드(화이트박스, 팰리서캐피털 등)를 통해 삼성물산에 고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 등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 패턴을 보면 그 다음 먹잇감은 매년 10조원 내외를 배당하는 삼성전자가 될 지도 모른다. 기업에 여유가 있어 더 많이 배당하는 주주가치 제고방안을 수행할 수 있다면 두말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전세계는 생성형 AI(인공지능)를 필두로 한 새로운 반도체 '쩐의 전쟁'이 벌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서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AI칩을 선점해야 한다는 절박성 때문이다.


AI칩 분야에서 엔비디아의 독주체제를 무너트리기 위해 오픈AI, 소프트뱅크,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메타 등 전세계 내로라하는 골리앗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오픈 AI 창업자인 샘 알트만은 전세계를 다니며 AI반도체 제조를 위해 7조 달러(한화 약 9300조원)에 달하는 펀딩에 나서고 있다. 거대 언어모델(LLM)의 챗GPT를 진화시키기 위한 기반을 다지겠다는 의지다. 반도체 설계 IP(지적재산)기업인 암(Arm)을 보유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도 1000억달러(133조원)를 AI 칩 개발과 생산에 투자하겠다는 뜻을 내비쳐 '반도체 대전'에 불을 당겼다.

과거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와는 그 규모 자체가 다른 대전(大戰)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메모리와 파운드리 등 반도체 시설투자에 48조 4000억원 가량을 투입했다. 현재 순현금으로는 2년 정도의 시설투자도 못하는 규모다. 삼성전자가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에 지난해 20조원을 차입한 것도 이런 위기감의 발로다.

지난 1월 인텔이 도입한 네덜란드 ASML의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NA 0.55, EXE:5000)의 가격은 1대당 3000억원 정도지만, 올해말에 나올 버전(EXE:5200)은 1대당 5000억~6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 1개 라인당 30조원(삼성전자 평택 P1라인 기준)이 들었다면 차세대 라인 1개에는 40조~50조원 이상이 든다. 첨단 라인 2~3개를 지으려면 100조원에 달하는 자금이 필요하다. 지금 보유한 현금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또 자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할 경우 적극적인 기업인수합병(M&A)을 통해 내실을 다져야 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 동안 삼성전자가 인수의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던 AMD나 Arm, 자일링스, 글로벌파운드리 등은 최근 몇년새 그 가치가 2~3배 이상 올랐다. 수십조원에서 수백조원에 이르는 인수 대금에 대한 부담도 만만찮다.

AI 시대는 누가 더 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단순히 주식을 소각해 1주당 가격에 영향을 주는 방식이 아니다. 기업 내면의 경쟁력을 높여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비로소 가치가 높아진다.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자산의 미래 생산성'에 초점을 맞춰 투자한다고 투자철학을 밝힌 바 있다.

주식을 '불태우는 일'(자사주 소각)은 미래의 생산성과는 전혀 무관한 자본 나눠먹기에 불과하다. 사실 삼성전자의 배당을 높이면 가장 좋아할 사람은 대주주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일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런 단기적 기업가치 제고방법보다는 미래성장 사업에 자원을 투입해 주주가치를 장기적으로 높이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이것이 단기 시세차익을 바라는 일부 행동주의 펀드와 조부 때부터 80년 이상 삼성을 이끌어온 삼성가(家)의 기업가치 제고방식의 차이다. 단기투자자는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알을 빼서 나누는 것을 원하지만, 장기 투자자는 거위를 살찌워 계속 황금알을 낳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어느 것이 삼성과 한국 기업들의 가치를 높이는 일인지는 뻔하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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