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장에서 주주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규정들

#개인투자자 A씨는 코스닥기업에 투자하던 중 매년 배당으로 나가는 돈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주주의 지분이 많아 배당이 대주주의 '배 불리기'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A씨는 주주총회에서 배당을 철회시키기 위해 같은 생각을 가진 소액주주들을 모으기로 했다. 그런데 회사 측에서 의외의 연락이 왔다. 배당이 부결될 경우 재무제표까지 문제가 생겨 A씨가 투자한 종목이 관리종목에 지정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정기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소액주주의 권리 찾기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소액주주가 주주총회에서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다. 현행 규정상 코스닥기업의 경우 배당이 부결되면 관리종목에 지정될 가능성이 있다. 개정된 상법의 영향으로 배당을 의사회 결의만으로 결정하는 기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5일 한국거래소 상장규정에 따르면 코스닥기업은 사업보고서 제출 마감 다음날(올해는 4월1일)까지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연간 재무제표를 승인받지 못하면 관리종목에 지정될 수 있다. 배당은 보통 이익잉여금에서 분배되는데 배당이 회사측이 제시한 금액에서 벗어날 경우 연간 재무제표를 새로 작성해야 한다.

배당이 부결되면 주주총회를 연회한 뒤 새로운 재무제표를 가지고 속개, 의결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3월 말에 주총을 개최한다면 연회 후 속개까지 시간이 걸려 재무제표 승인 시한을 어길 가능성이 높다.

관리종목에 지정되면 매매가 30분 단위로 이뤄져 거래에 불편을 겪는다. 또 신용거래가 금지되며 해당 주식을 대용 유가증권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제약들로 관리종목에 지정되면 보통 주가가 하락한다. 다만 유가증권시장 기업은 상장규정이 달라 재무제표 승인이 미뤄지더라도 특별한 처벌은 없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주총에서 배당이 부결돼 관리종목에 지정된 실례를 찾기는 힘들지만 원칙상으로는 코스닥기업이 주주총회에서 재무제표를 승인받지 못하면 관리종목에 지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배당 부결을 피하면서 주주들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주주제안이 있다. 그러나 주주제안은 주총 개최 6주전에 이뤄져야 하는 데 반해 상장사는 주총 2주전에만 주총 공지를 하면 된다. 주총일과 주총안건을 알지 못한 채 주주제안을 해야 하는 것이다.

2011년에 개정된 상법으로 이사회의 권한이 강화된 것도 주주들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상법 449조2항에 따르면 △재무제표에 대한 외부감사인 의견이 적정하고 △감사위원 전원이 동의한다면 정관에 따라 재무제표 및 배당 등을 주총에 회부하지 않고 의사회의 결의만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

외부감사인의 '비적정' 의견은 상장폐지 사유가 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다. 외부감사인의 '적정' 의견은 정상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 평가다. 감사위원의 전원 동의 역시 감사위원이 회사 친화적인 인물로 꾸려지는 한국 기업 문화상 어렵지 않은 조건이다.

대기업들은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 정관상 이사회 의결로 재무제표 및 배당을 처리할 수 있어도 주주총회 안건으로 부치는 경우가 많다. 코스닥기업 중에서는 의사회 의결로 재무제표 및 배당을 승인하는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의결권 행사를 통해 배당 수익을 확대하겠다는 국민연금의 입장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코스닥 시총 3위인 동서는 올해 재무제표 및 이익 배당을 주총 안건이 아닌 이사회 결의 후 '보고 사항'으로 기재했다. 이 외에 WISCOM, 국도화학, 경방, 서흥, 성보화학 등도 이사회를 통해 배당을 결정하고 주주총회에는 보고만 하고 있다. 이 중 국도화학은 국민연금이 10%(지난해 9월 말 기준), 서흥은 10.64%, WISCOM은 5.01%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