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청산하는 외국인…'코리아 밸류 트랩' 빠지나

외국인들의 '셀 코리아' 행보가 심상치 않다. 투자비중이 크지 않은 코스닥에선 매수로 대응하고 있으나 정작 중요한 코스피 시장에선 이달 들어 4조원에 육박하는 주식을 처분하는 등 자금이 쉼 없이 빠져나가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추세가 굳어지면 한국증시가 만성적인 저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밸류트랩(가치의 함정, Value trap) 국면'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매일 5000억원 이상…심상치 않은 외국인 매도세


26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이달 25일까지 코스피시장에서 총 3조1344억원의 주식을 순매도했다. 이날 매도분(5480억원 가량)을 더하면 3조7000억원에 육박한 수치다. 2013년 6월 기록한 5조197억원 이후 최대 규모다.

투자여건이나 기업들의 상황과 무관하게 주식을 팔고 나가는 모습도 엿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다.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이 꺾이기 시작했던 지난해에도 외국인들이 쉬지 않고 사들였던 종목이다.

지난해 상반기 삼성전자 외국인 순매수 금액은 1조8890억원에 달했고 하반기는 2조287억원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선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상반기에 순매도로 돌아선데 이어 하반기에도 6500억원 이상 주식을 파는 등 매도규모가 커졌다.


외국인들은 또 올 하반기에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 아모레G 등 업종 대표주를 대거 처분했다. 이들이 순매수한 종목은 현대차, SK이노베이션, 현대모비스, 삼성SDS, S-OIL 등 낙폭 과대주에 국한됐고 순매수 금액도 1000억~3000억원 가량으로 크지 않았다.

올해 연간으로 보면 아직은 외국인이 순매수(3조원) 포지션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 매도세가 워낙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어 조만간 순매도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외국인 순매도는 2011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24일 골드만삭스는 한국시장과 관련해 투자비중을 매수(Overweight)에서 중립(Marketweight)으로 낮췄다. 메릴린치는 앞선 5월 한국증시 '비중축소' 의견을 제시했다.

문제는 외국인들이 한국주식만 파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올해 1월에서 5월까지 한국, 대만,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아시아권 7개국에서 249억5200만달러의 주식을 순매수했다. 그러나 6월부터 순매도로 돌아서 이달 현재까지 150억7500만달러를 현금화했다. 이 가운데 한국과 대만증시에서 빠져나간 금액이 108억달러 가량으로 가장 컸다. 현재 한국증시가 처해있는 상황을 보려면 이들의 자금이탈 배경을 우선 분석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시아 마켓 전체를 파는 외국인…이유는

증권가는 올 상반기만 해도 아시아 증시에서 빠져나가는 외국인 매도세가 단순히 미국 금리인상에 따른 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최근엔 "미국 이외의 변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단 중국의 경기둔화 흐름이 시장의 평가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처한 상황도 생각보다 나쁘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시장 성장률 전망치가 3분기와 4분기는 물론 연간으로도 7%를 하회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아시아의 대표적인 수출국인 대만과 한국의 수출량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경우 지난해 수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사례가 있었지만 곧바로 플러스(+)로 전환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선 다시 마이너스 성장세가 나타났고 대만도 올해 4월부터 이런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대투증권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외화보유고가 충분치 않다는 점도 외국인들의 아시아 철수 배경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국가경제에서 원자재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라다.

김두언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중국 위안화 평가절하 이후 이들 동남아 3국의 통화가치가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며 "인도네시아의 경우 환율 안정을 위한 시장 개입에 나서면서 외환보유고가 5개월 연속 감소했고 반대로 달러채무는 늘어 유동성에 부담이 된다"고 지적했다.

◇코리아 밸류 트랩, 증폭되는 우려

전문가들은 아시아 경기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급격한 위기가 오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각국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금이 계속 이탈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

특히 한국은 외국인 매도세가 계속될 경우 '만성적인 저평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밸류 트랩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되면 주가 저평가의 기준이 되는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를 밑도는 경우가 종목이 속출한다. 시장 전체의 PER(주가수익비율)이 낮아져도 주가가 오르지 못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밸류 트랩에 빠지는 경우는 크게 2가지다. 우선 한국기업들의 현재 장부가치나 미래가치에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다. 대규모 손실을 감췄다가 올해 2분기 3조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내 시장에 충격을 준 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이다. 이 여파로 다른 조선업체들의 주가가 동반 하락했고 이 결과 청산가치를 밑도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현재 3900원대 주가인 한진중공업의 경우 올해 예상실적을 토대로 본 PBR이 0.3배에 불과하고 나머지 기업들도 PBR이 대부분 0.5배 안팎에서 형성돼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조선업계 자산가치 산정에 반영이 되는 매출채권이나 부동산 가치, 재고자산 등의 수치를 믿기 어렵게 됐다"며 "이 때문에 아무리 기업가치가 저평가 돼있다고 해도 주가가 오르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밸류 트랩은 또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수급붕괴로 발생한다.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경제위기 당시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 투매가 일어나며 가격이 급락한 게 이런 사례다.

주식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국내 기관과 연기금 등이 시장을 지지하고 있지만, 시장이 일시적으로 밀릴 경우 대규모 연쇄 손절매가 시장을 함께 누르는 악순환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계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코스피200지수 기준으로 213까지 하락할 수도 있어 보인다"며 "이 수준이 무너진다면 외국인이 투자한 주식 대부분이 손실구간에 진입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다른 아시아시장과 달리 박스권이 2~3년 이상 계속됐기 때문에 충격이 더할 것"이라며 "지지선이 깨질 경우 외국인 투자자들의 손절매 트리거(촉매)가 나타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