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미 쪼꼬렛" 외치던 아이..미국 의사 돼 고국서 기부활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기부자 모임 '아너소사이어티'의 회원인 권영만 원장이 경북 의성군 소재 권의원에서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제공=사회복지공동모금회

"기부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일이죠. 내 몸을 녹여 남에게 간을 내는 소금이라도 될 수 있다면, 남을 위해 조그만 빛이라도 될 수 있다면 괜찮은 삶 아닐까요."

'의성마늘'로 유명한 경북 의성군에는 '특별한 의사'로 통하는 이가 있다. 다양한 기부활동과 의료봉사로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권영만 권의원 원장(62)이 그 주인공이다.


경북 의성군 안계면 소재 권의원에서 만난 권 원장은 기부의 매력을 묻는 기자에게 "자기 만족감 때문에 하는 기부는 옳지 않다"고 강조한 뒤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남을 위해 하는 일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며 기부를 "소금과 빛이 되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권 원장은 2013년 11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를 약정하고 이듬해 연말 본인 이름으로 1억원을 넘게 기부해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한달에 1000만원 가량의 금액을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모두 완납한 뒤에는 장학금 1억원을 사회에 내놓는 등 다양한 기부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군에게 초콜릿 받던 아이.."남 돕는 사람 되겠다" 다짐=마음이 푸근해지는 얼굴, 소박하게 꾸민 진료실. '시골의사'라는 인상을 풍기는 권 원장에게는 익숙한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길버트 영 권'(Gilbert Young Kwon)이라는 영어 이름이다. 권 원장의 기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권 원장은 6·25 전쟁 휴전 후 국가 재건이 한창이던 1955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한 가정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미군 부대가 주둔했던 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권 원장은 친구들과 함께 군 부대 철조망을 넘어 미군에게 말을 거는 게 일상이었다고 했다.

어려운 생활에 군것질거리도, 장난감도 마땅히 없던 당시 아이들은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미군에게 "기브 미 쪼꼬렛"을 외치곤 했다. 미군들은 영어 발음이 서툰 아이들에게 웃으며 때론 초콜릿을, 때론 통조림을 넘겨줬다. 미군이 구슬을 건네준 날에는 친구들과 하루 종일 구슬치기를 하며 놀기도 했다.

권 원장은 "어린아이였지만 미군의 배려를 느끼며 언젠가는 나도 남을 돕고 사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난했던 시절,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그가 기부를 위한 삶을 살게 된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권 원장은 미군들에게 말을 걸며 배운 영어를 갈고 닦으며 공부한 뒤 성인이 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여기서 얻은 이름이 길버트 영 권이다.

(왼쪽부터) 김복규 의성군수, 권영만 권의원 원장, 이대공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권영만 원장이 2013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기부자 모임 '아너소사이어티'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모습./사진제공=사회복지공동모금회

◇美 유학 가 의사 인생 시작.."기부는 자랑이 아니라 일상생활"=권 원장은 국내 수도권 한 대학교에서 보건학과를 졸업한 뒤 1982년 미국으로 떠났다. 학비가 빠듯했지만 공부에 욕심이 많았고 집안 어른들의 권유도 있었다.

권 원장은 한인들이 많이 사는 로스엔젤레스(L.A.)에 자리잡아 칼스테이트 대학에서 보건학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의료봉사 현장 등에서 만난 여러 의사들을 보며 의료로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의학 공부를 결심했다. 그 길로 공부해 캘리포니아대학 L.A.캠퍼스(UCLA)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권 원장은 당초 짧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공부에 재미를 붙여 눌러앉게 됐다. 그는 길버트 영 권이라는 미국 시민이 된 이후 한국으로 치면 지역 보건소에 해당하는 의료시설에서 일하며 기부에 눈을 떴다.

권 원장은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한인들을 돕다 기부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남을 도와주는데 인색한 면이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평범한 직장인들이 기부단체에 한 곳 이상 가입해 월급 일부를 매달 기부하거나 청소년들은 용돈을 모아 꾸준히 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권 원장은 "미국인들에게 기부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 일상생활이었다"고 말했다.

권 원장은 기부와 의료봉사를 통해 과거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돌려주며 살아갔다. 그러던 중 2006년에 편찮으신 노부모를 모시고자 아내와 아들 둘을 미국에 남겨놓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20여년만에 돌아온 한국..의성군서 '기부 홍보대사'로 생활=의성군은 권 원장에게는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곳에 병원을 차렸다. 부모님이 오랜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경북 안동시로 귀향하자 차로 10분 거리인 의성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20년 이상이 흐른 뒤 돌아온 고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경제는 발전했고 국민 생활은 좋아졌다. 그러나 권 원장이 본 농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회적 약자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고 안타까운 사연들도 들렸다.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교회를 통해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이유다.

그러던 중 2013년 어느 날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기부하거나 사람을 돕는 일도 의미가 있지만 단체를 통해 기부한다면 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부금이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후 1년여만에 1억원을 쾌척해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그 뒤에는 수도권 한 대학에서 장학금 기부 요청을 받아 1억원을 내놓는 등 다양한 곳에 기부를 이어갔다. 권 원장은 "기부 목표를 해마다 소득의 30%로 잡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다"며 "기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권 원장은 '기부 홍보대사'로도 바쁜 삶을 보낸다. 그는 국내에서도 기부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미국과 비교하면 빈도수가 적은 편이라며 지인과 친지를 만날 때마다 "나눠주고 살자"며 기부를 권유하고 있다.

권 원장은 최근 사회에서 갑질 논란이 화제인 것과 관련해 "갑질하면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과연 잘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사회와 더불어 가는 사람, 같이 가는 사람이 '당당한 부자'가 됐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