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추석]<상>"작년엔 언제 결혼하냐더니, 올핸 애는 언제…"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추석 연휴 기간 친척과의 관계 형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진=pixabay

평소엔 화가 나도 잘 참을 수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를 제어할 만큼 훈련된 자아가 있었고, 집요하게 늘어지는 질문도 없어 대충의 대답으로 잘 넘길 수도 있었다. 스트레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마음 어느 한구석에 숨겨둘 수는 있었다. 하지만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서 감춰둔 스트레스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1. 소풍 앞둔 학생 마음처럼 긴 추석 연휴에 설레던 직장인 김모(여·26)씨는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난해처럼 ‘남자친구 있느냐’, ‘결혼 언제 할 거냐’ 등 해묵은 가족과 친척들의 도돌이표 질문에 숨이 막혔기 때문.


김씨가 궁리 끝에 내놓은 해결책은 추석 근무 지원. 근무를 핑계로 가족들 잔소리를 피하려 하자, 이번에는 직장 상사가 “집에 가야지, 왜 근무를 하려고 하느냐”고 질책해 이중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김씨는 “대체 남의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며 화를 삭이지 못했다.

#2. S업체에 다니는 강모(29)씨는 친척들의 잔소리가 없어도 스트레스를 ‘은근히’ 받고 있다. 직장이 변변치 않은 사촌 형에게 잔소리하는 친척들이 ‘모범 사례’로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꺼내며 비교하기 때문. 강씨는 “취직한 이후 간접적으로 비교 대상이 돼 가시방석”이라며 불편해 했다.

더 큰 문제는 친척 형과 이 일로 더 서먹해진 듯해 대면하기 갈수록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강씨는 “올해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기도, 안 내려가기도 이상한 상황이 돼 고민”이라며 “만약 내가 결혼 소식이라도 먼저 전하면 사촌 형이랑 의가 끊어질까봐 두렵기도 하다”고 했다.

민족대명절 추석 연휴 시작을 하루 앞둔 29일 오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역귀성객들이 터미널을 나서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사진=뉴시스

뜻밖의 선물 같은 긴 연휴 기간이 찾아왔지만, 2030 세대에게 추석은 불편함을 넘어 ‘분노의 추석’으로 인식되고 있다. 연휴 기간이 아니었다면, 제법 크게 느끼지 않았을 일들이 연휴 기간을 맞아 화를 돋우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

화를 부르는 스트레스 종목은 단순히 직장이나 결혼 문제로 국한하지 않는다. 직장인 김모(여·25)씨는 “이젠 연봉”이라며 친척들이 꼬치꼬치 캐묻는 월급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고 전했다. 정치적 성향도 예외는 아니다.

직장인 허모(32)씨는 “고향 경상도에 내려가면 진보정권에 대한 각종 비판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사상을 강요하는 설교를 듣고 있어야 하는 시간을 견디는 것도 화를 부른다”며 “생각만해도 고통스럽다”고 했다.

남녀평등 사상과 근대적 사고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들은 추석 연휴 기간이라는 ‘보수적 시간’에 전근대적 사고로 귀향해야 한다는 점에 가장 큰 분노를 느끼고 있다.

“아직도 추석에 남녀의 밥상을 따로 놓는다”, “어디 남자가 주방에 들어오느냐”, “어느 엄마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두고 취미활동을 해?”, “여자가 무슨 나랏일에 신경쓰냐” 등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여혐’ 발언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지적이다.

몇 년째 반복된 전근대적 방식을 경험한 일부 세대들은 과감하게 명절을 포기하기도 한다. 지난해 외국인과 결혼해 외국에서 사는 박모(여·26)씨는 “결혼 전엔 남자친구와 언제 결혼하느냐고 난리여서 결혼 후엔 잔소리가 없을 줄 알았는데, 올 설 연휴에 ‘애는 언제 낳느냐’고 닦달해서 올해 추석은 한국행을 포기했다”며 “당분간 한국에 들어오더라도 명절은 피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명절 스트레스를 이유로 혼자 연휴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녀의 절반 만이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응답했다. /일러스트레이트=이지혜 디자이너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지난 9월 11월부터 24일까지 미혼남녀 471명(남 232명, 여 239명)을 대상으로 추석 명절 계획을 물은 결과 55.8%가 고향을 찾겠다고 답했고, 절반가량인 44.2%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고향을 포기한 응답자 중 40.8%는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답해 연휴 기간 가족과 친척을 만나는 일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 젊은 세대들은 전통적인 가치관과 완전히 달라진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는데,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의 기준에 맞추라고 재촉한다”며 “젊은 세대는 갈등이 아닌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고향 찾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