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아서 재미없어요" 3종 세트에 갇힌 놀이터

"긴 미끄럼틀이 있으면 좋겠어요. 놀이터에 있는 미끄럼틀들은 너무 짧아서 재미가 없어요."

2일 오후 서울 관악구 한 놀이터에서 만난 이태준군(6)이 미끄럼틀을 탄 뒤 이렇게 말했다. 이군이 탄 미끄럼틀은 본인의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다. 몇 번 미끄럼틀을 타던 이군은 친구들과 뛰어놀기 위해 자리를 떴다.


벤치에 앉아 이군을 바라보던 어머니 이정은씨(34)는 "이 근처 놀이터는 다 획일화 돼 비슷한 미끄럼틀과 그네 정도만 있다"며 "놀이터들이 규모도 커지고 더 다양한 시설이 설치됐으면 아이에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지 않는다. 어느 곳이든 비슷한 크기, 비슷한 모습의 놀이터에서 흥미를 느끼기 어려운 탓이다. 미끄럼틀, 그네, 시소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놀이터 3종 세트의 한계라는 지적이 나온다. 갈수록 즐길 거리가 많아지고 놀이터는 외면 받는 현실에서 아이들이 다양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놀이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실제로 놀이터나 학교보다 집에서 노는 것을 선호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다. 육아정책연구소(2017)에 따르면 아동의 주 놀이 공간을 '집'으로 선택한 경우가 72.7%로 가장 많았고 '놀이터와 공원'은 18.0%에 그쳤다.


놀이터 3종 세트는 아파트 단지가 급속도로 만들어지던 산업화 시대 산물이다. 20세기 중반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표준화된 놀이터가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마을이 함께 만드는 모험놀이터' 저자 김성원 놀이터 디자이너는 "아파트 단지가 급속도로 만들어지던 1960년대 후반 이후 국가에서 표준화 된 놀이터를 대량으로 공급했다"며 "놀이터 건설이 시민운동에서 시작한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국가 주도의 놀이터 건설을 비판하거나 혁신하려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정부의 안전 기준을 쉽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검증된 3종 세트를 설치하는 것이 가장 쉬운 답이었다. 진용근 신바람놀자학교 이사장은 "놀이터를 구성할 때 안전과 위험을 적절히 배합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놀이기구가 조금만 위험해도 허가가 잘 나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양한 놀이를 구상하면서 놀아야 하는데 어른들이 정해준 놀이만 하다가 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놀이터를 이용하는 아이들과 학부모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다. 육아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 내·자택 주변 놀이터 이용률은 한 달에 9번 꼴로 놀이시설 중 가장 높았지만 만족도는 3.42점(5점 만점)으로 14개 놀이 유형 중 뒤에서 두 번째에 그쳤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자유롭게 노는 데 방해되는 요인으로 안전한 놀이 공간과 양질의 놀이 공간 부족(28.2%)을 첫 번째로 꼽았다. 가장 자주 즐기는 곳이지만 만족도는 가장 떨어진다는 얘기다.

7살 아들을 둔 학부모 박모씨(37)는 "집 근처 놀이터가 있어서 아들과 자주 나와서 놀긴 하지만 매번 같은 것을 하고 놀 수는 없어 고민이 많다"며 "그렇다고 매번 키즈카페나 새로운 곳으로 놀러 가기에는 돈과 시간이 모두 문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다양한 놀이를 보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성원 디자이너는 "시민단체나 지역 주민들이 직접 놀이터 설계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불을 피우거나 집을 짓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단순히 놀이기구를 안전하게 짓는다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놀이활동가를 각 놀이터에 배치해 아이들을 직접 관리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네 단위로 아이들의 놀이 환경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연금 '조경작업소 울' 소장은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랜드마크 놀이터'를 짓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나이와 상황에 따라 하천 부지, 마을 뒷산, 공터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논다"며 "하나의 놀이터에서 모든 아동의 특성을 담아내려고 하면 '뻔한 놀이터'가 되기 때문에 동네 단위로 부족한 놀이환경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