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소멸시효 끝' 주장만으로 장해급여 지급 거절 못해"

근로복지공단이 법정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진폐증에 걸린 노동자의 장해급여 청구를 거절한 것은 위법하다고 법원이 판결했다. 진폐증은 폐에 쌓인 분진 때문에 생기는 호흡기능 장애로, 대표적인 산업재해 중 하나로 꼽힌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단독 이승원 판사는 김모씨 등 노동자 8명의 유족들이 "장해급여를 줄 수 없다고 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8일 밝혔다.


김씨 등은 분진이 심한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로, 1992~2000년 사이 진폐증에 폐결핵·기흉·흉막염 등 합병증까지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들은 2016년 11~12월 사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로 인해 장해가 생겼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장해급여 지급을 요구했다. 이미 숨진 노동자들은 유족이 대신해 공단에 급여청구를 냈다. 노동자들은 근로복지공단에서 요양승인을 받고 요양하다 7~19년쯤 뒤 숨졌다.

그러나 공단은 △장해급여는 노동자가 치유를 받고 난 뒤에도 장해를 겪고 있을 때 지급하는 것인데 김씨 등은 치유가 아닌 요양 상태였고 △김씨 등이 요양승인 당시로부터 3년 내 장해급여 지급 청구를 내지 않아 권리가 소멸했으며 △일부 노동자는 진폐증 진단을 받긴 했으나 심폐기능은 '정상'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 법률에 따르면 이런 노동자에 대해서는 장해등급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구를 모두 거절했다. 유족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때는 노동자들이 모두 사망한 뒤였다.

먼저 이 판사는 공단의 거절 사유 중 김씨 등이 치유가 아닌 요양 상태라 지급 요건이 안 된다고 한 것, 당시 법률에 따르면 심폐기능 정상 판정을 받은 노동자에게 장해등급을 매길 근거가 없다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이 판사는 "진폐증은 현대의학으로 완치가 불가능하고 진행 정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며 "산업재해보상보험법령은 진폐증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진폐증에 대해서는 일반과 달리 장해등급 기준에 해당하게 되면 곧바로 장해급여를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따라서 김씨 등은 바로 장해등급에 대한 장해급여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었고, 근로복지공단은 요양 중이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이 판사는 "2003년 7월1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심폐기능 장해는 없고 진폐증 병형 1형 판정을 받은 자에 대해 장해등급을 부여하는 규정이 마련됐다"며 "취지에 비춰보면 새 시행규책 시행 전 진폐증 진단을 받아 치료 중인 근로자에 대해서도 개정 규정에 따라 바로 장해급여를 지급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 판사는 이들의 급여청구권이 소멸했다는 공단의 주장은 사실관계 상으로는 맞다고 봤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12조에 따르면 이 사건의 급여청구권은 3년 내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된다. 그러나 이 판사는 이들이 급여 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한 것은 공단의 권리남용 때문이라며 공단의 권리소멸 주장을 기각했다.

이 판사는 "진폐증 진단을 받아 요양 중인 근로자의 장해급여청구에 대해 공단은 일관되게 지급을 거부해왔다"며 "진폐증 또는 그 합병증으로 요양 중인 근로자들이 권리행사를 해도 공단이 거부할 것이 명백해 권리행사를 하지 못한 것에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판사는 또 "김씨 등이 진폐증에 의한 요양신청에 대해 공단은 요양을 승인하고 통지했을 뿐 장해등급에 대해서는 어떤 통지나 안내도 하지 않았다"며 절차상 문제를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이 판사는 "요양 중이어서 장해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요양승인 결정이 있던 때로부터 3년이 지나 장해급여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공단의 태도는 매우 모순적"이라고 지적했다. 요양과 장해급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 이미 요양승인을 해줬기 때문에 장해급여청구권은 시효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