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한 여성은 이기적?'… 여성에게만 죄를 묻다

/사진=임종철 디자인기자

"우리 사회는 낙태한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낙태에 있어서 남성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 이렇게 답했다. 정부의 인공임신중절(낙태) 실태 조사결과에서다. 한국 사회에서 낙태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오롯이 '낙태한 여성'에게 향해 있다.

◇응답자 90% "남성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사회"…여성에게만 죄를 묻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는 지난 14일 보건복지부 의뢰로 진행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대상자는 전국 만 15~44세 여성 1만명. 이 조사에서 낙태에 대한 자신과 사회의 인식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62.8%는 '낙태한 여성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물음에 "사회 인식이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스스로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는 10.6%에 불과했다.

'낙태에 있어서 남성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는 질문에도 응답자의 89.4%가 "사회인식이 그렇다"고 밝했다. "스스로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12%포인트 하락한 77.4%를 기록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낙태한 여성을 비난한다.

여성들은 낙태에 대한 사회적 비난뿐만 아니라 '처벌'도 혼자 받는다. 응답자 75.4%가 "형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답한 가운데, 그 이유에 대해 66.2%가 "인공임신중절시 여성만 처벌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행 형법 269조 1항과 270조는 낙태 수술을 받은 '부녀'와 수술한 의사를 각각 1년 이하, 2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임신에 함께 책임이 있는 남성은 처벌할 수 없는 셈이다. 다만 형법상 방조범 규정에 따라 병원에 함께 가거나 수술비를 부담하면 남성도 처벌이 가능하다.

앞서 조 국 청와대 민정수석도 낙태죄 폐지를 요청하는 청원 답변 과정에서 "현행 법제는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피임·임신·출산, 남녀공동책임의식 강화해야"…헌재 합헌 입장 바뀔까

이들은 낙태와 관련한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피임·임신·출산에 대한 남녀공동책임의식 강화(27.1%)'를 꼽았다. 여성들이 '공동책임의식 강화'를 외치는 배경에는 비난, 처벌 등 실질적 피해 및 사회적·경제적 책임을 함께 감당하자는 뜻이 담겨있다. 나아가 '양육에 대한 남성 책임을 의무화할 수 있는 법·제도 신설(18.1%)'에 대한 의견도 있었다.

대학생 박모씨(21)는 "남자들도 임신할 수 있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남성에게도 최소 절반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낙태를 하면 비난을 받고 낳으면 혼자 책임을 져야 하니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낙태 합법화에 찬성하는 직장인 조모씨(29)는 "낙태가 합법화된 이후에도 남성보다 여성을 비난하는 행태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고, 책임은 함께 져야 한다"고 말했다.

누리꾼들도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에 왜 여자가 다 감당해야 하냐", "왜 여자와 의사에게만 죄를 묻냐", "아기는 혼자 생긴 게 아니다" 등 편중된 책임을 지적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현재 낙태죄 처벌조항인 형법 269조 1항 등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심리 중이다. 앞서 헌재는 2012년 8월 같은 조항 헌법소원 심판에서 재판관 4대 4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번 발표로 낙태죄 처벌 논란이 재점화되면서 조만간 위헌 여부에 대한 답을 내놓을 전망이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재생산권 확보를 위한 법·제도 개선 방향 모색 토론회'에서 "사회·경제적 사유 하에서 여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보유한 주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여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신을 지속할 수 없는 일종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임신한 여성들은 국가가 자의적으로 그어둔 선에 의해 합법적 임신중단의 허락을 받거나 아니면 범죄자가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