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쥐어뜯는 실수요자 vs '줍줍' 나선 현금부자

지난해말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자이갤러리를 찾은 청약희망자들이 위례포레자이 청약 상담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사진제공=뉴스1

#직장인 A는 청약점수 26점으로 'e편한세상 광진 그랜드파크' 84B타입에 당첨된 후 골머리를 앓고 있다. 1순위 청약 결과 미달. 게다가 분양가격 9억원 초과로 중도금 대출도 안된다. 1순위 자격을 날리느니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보기로 했지만 밤잠이 오지 않는다.

#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주부 박 모씨는 지난달 9일 'e편한세상 청계센트럴포레' 잔여가구 추첨현장을 찾았다. 잔여 가구를 확보하는 일명 '줍줍'을 위해서다. 이날 현장엔 박씨 외에도 미계약분 90가구 추첨에 3000여명이 몰렸다.


성수기 3월을 맞아 분양물량이 늘었지만 실수요자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분양가 상승으로 시세와의 '갭'(차이)이 좁혀진데다 중도금 대출도 여의치 않다. 청약불패로 꼽히던 서울도 지역별로 명암이 갈려 '묻지마' 청약으론 낭패를 볼 수 있는 것. 반면 현금부자들은 잔여가구 '수집'에 나서고 있다.

5일 부동산114에 따르면, 이달 전국에서 33개 단지에 걸쳐 총 2만7868가구 중 2만21가구가 일반 분양한다. 지난달보다 분양 단지는 25개, 일반분양 가구는 1만3505가구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이달 1일부터 기본형 건축비가 지난해 9월 대비 2.25% 상향돼 건설사가 미뤘던 분양을 본격 재개한 결과다. '청량리역 해링턴플레이스', '원주 더샵센트럴파크', '운정신도시 파크푸르지오' 등 7개 단지가 대표적이다.


분양 채비를 서두르는 건설사와 달리 실수요자들의 분양환경은 녹록지 않다. 서울은 분양가 상한제가 유명무실하다 싶을 정도로 시세의 110% 내외에서 분양가격이 결정되고 있다. 여기에 2주택자는 물론 규제 지역 내 공시가격 9억원 초과 주택은 실거주 외엔 대출이 안된다.

홍제3구역주택재개발조합이 시행한 '효성 해링턴플레이스'는 전용 59㎡가 타입에 따라 7억원을 넘었고 84㎡도 8억 중후반대였다. 인근 입주 20년차인 '홍제원현대'(홍제힐스테이트) 전용 84㎡ 시세가 7억원. 하지만 노후 단지가 많다 보니 '신축' 효과가 부각돼 청약경쟁률 11대 1을 기록하며 1순위 마감했다.

업계 관계자는 "홍제동임을 감안하면 분양가가 무거운건 사실"이라며 "수요층이 두터운 84㎡는 대출규제를 피하도록 최고 분양가를 9억원 바로 밑인 8억9100만원대로 정한 것 같다"고 밝혔다.

태릉현대를 재건축하는 '태릉 해링턴플레이스'도 평균 청약경쟁률 12대 1로 1순위 마감됐다. 분양가는 전용 59㎡가 4억 후반대, 74㎡는 5억 중반, 84㎡는 6억원대였다. 분양가에 대한 의구심에도 지역 내 신축이 귀해 청약은 흥행했다.

문제는 실제 계약률이다. 이들 지역은 실수요 청약이 대다수로 추정되나 청약제도 개편 이후 자격요건이 까다로워져 미자격자 당첨분이 속출하는 추세다. 현금 부자들이 미계약자의 잔여가구를 소화해줘야 미분양으로 번지지 않는 것.

실제로 지난달 9일 서울 동대문구 'e편한세상 청계센트럴포레' 잔여물량 90가구 추첨엔 3000여명이 몰렸다. 같은 달 15일 잔여 가구를 모집한 대구 '남산 자이하늘채'도 44가구 모집에 2만6649건이 접수됐다.

현금부자들은 청약미달이나 청약 후 정당계약이 이뤄지지 않은 잔여가구 물량을 흡수하면서 분양시장의 '스펀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금부자들의 잔여가구 수거를 뜻하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건설업계에선 일반 1순위 청약경쟁률이 무의미해졌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조영광 대우건설 하우스노미스트는 "1순위 청약통장을 들고 있는 실수요자는 현금이 없고, 현금을 쥔 자산가들이 미자격이나 미분양 물량을 거둬가니 이를 지칭하는 '줍줍'이란 말까지 생겼다"며 "현금 동원력이 없는 실수요자가 섣불리 청약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