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미스터리.. 그는 왜 마술을 9월로 연기했을까

묘수인가 꼼수인가. 예상과 달리 벤 버냉키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은 26일(현지시간) 마술모자에서 토끼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개봉시점을 9월로 그냥 연기했다. 덕분에 투자자는 어떤 부양책이 나올지 상상하느라 흥분된 한달을 보내게 됐다.

당초 시장에서는 버냉키 의장이 이날 잭슨홀 컨퍼런스 연설에서 양적완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장기국채 매입 비중을 늘릴 가능성 정도는 시사할 것으로 봤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추가 부양책과 관련한 언급은 일체 없었다. 구체적 정책수단을 지칭하는 단어자체가 연설에 등장하지 않았다.


이같은 의외성에 시장은 한때 요동쳤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한때 전날대비 220포인트 급락한 1만929.2로 밀렸다. 달러값도 강세로 갔다.

곧 버냉키 의장의 진심이 읽히며 시장은 정상을 되찾았다. 다우지수는 135포인트 상승 마감했고 달러값도 약세로 갔다. 금값과 유가도 올랐다. 그러나 왜 그가 정책수단에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고 단지 다음 통화정책회의만 주목하라 했는지 궁금증은 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버냉키, "추가부양책은 9월 FOMC회의서"


이날 연설에서 버냉키 의장은 "연준은 추가 부양을 위한 통화정책수단들을 갖고 있다(Federal Reserve has a range of tools that could be used to provide additional monetary stimulus)"고 자신했다. 그는 이어 "8월 FOMC회의에서 이 수단의 장단점을 따져봤고 9월 회의에서도 그 논의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다음달 20일 하루였던 FOMC 회의를 20일~21일 이틀로 늘리겠다" 는 일정변경 방침도 발표했다.

의장이 직권으로 통화정책회의 일정을 늘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난상토론을 거쳐 무언가 부양책을 내놓을 수 있다는 강한 시사다. 연설에서 언급된 "통화정책이 성장과 물가전망 변화에 즉각 대응해야한다"는 원칙론은 버냉키의 부양의중을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

작년과 다른 환경, 공적 의사결정기구 존중 의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버냉키 의장이 정책카드를 꺼내지 않은 것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라는 공식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존중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난 8월 통화정책회의에서 연준은 경기에 대한 높은 수준의 우려를 표시하고 제로금리를 2013년 중반까지 연장하는 조치를 내놨다. 이같은 조치가 있은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공적 의사결정을 무력화하는 정책시사를 하기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연준 안팎에서 추가 부양에 대한 논란이 많은 점도 버냉키로 하여금 시원하게 말을 못하게 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8월 회의에서 인플레 매파 3인방이 제로금리 연장에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이날도 버냉키 연설을 앞두고 매파중 한사람인 찰스 플로서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총재가 8월 FOMC 결정을 다시 한번 비판했다.

작년 8월은 이번과 달랐다. 지난해 8월10일 하루 일정으로 열린 FOMC회의에서 연준은 위험스럽게 위축되는 경제상황을 미처 주목치 못하고 별다른 부양조치를 내놓는 데 실패했다. 매파의 반대가 지금처럼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주의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는데 경제상황은 이후 예상보다 심하게 나빠져 버렸다. 이에 버냉키 의장이 통화정책 향배에 대해 서둘러 언질을 주는 것이 명분이 실렸다. 잭슨홀 컨퍼런스에서 버냉키 의장이 꺼낸 양적완화는 시간이 흐르며 FOMC 위원들의 공감을 얻어갔고 마침내 11월 회의에서 공식 결정된다.

버냉키, 부양의 명분 쌓기에 주력

이날 버냉키 의장의 발언을 보면 부양수단을 섣불리 언급하기 보다 부양조치의 명분을 쌓는데 주력한 흔적이 많다. 이는 미국경제의 어두운 현실을 장황하게 설명한데서도 나타난다.

그는 "침체의 골은 깊었고 위기후 미국경제 성장세가 당초 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약했다"고 고백했다. "향후 성장전망을 크게 낮췄다"고도 했다. 사실상 미국경제가 장기저성장국면에 놓여있음을 시인한 것이다.

경기부진 원인과 관련해 주택경기침체와 같은 구조적 요인에도 주목했다. 이전 경기부진이 일본지진이나 고유가와 같은 일시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보던 것과는 매우 다른 관점이다. 그리고 주택경기 침체가 경제의 많은 부분을 붙잡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많은 비중을 할애해 설명했다.

또 인플레이션율은 원자재가격 하락으로 연준의 내부목표치인 2% 이하로 내려올 것으로 내다봤다.

월가도 이날 버냉키 발언 이후 추가 부양조치의 가능성은 더 커진 것으로 해석하는 눈초리다.

케빈 캐런 니콜로 스타이펠 시장전략가는 "QE3에 적신호도 청신호도 주지 않았다"고 평가한 뒤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아님을 시사함으로써 뭔가 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놨다"고 평가했다.

스캇 브라은 레이몬드 제임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버냉키 연설에서 즉각 행동을 취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문은 열려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JP모간체이스 마이클 페롤리 이코노미스트는 "연준이 다음 FOMC에서 추가로 부양책을 취할 가능성이 다소 높아졌다고 본다"며 "장기채권 매입 비중을 높이는 조치가 유력하다"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