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담보대출 무산? 정부 '진퇴양난'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정부가 퇴직연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법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품 출시를 밀어붙이다 뒤늦게 은행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담보권 설정 없는 대출은 사실상의 신용대출이라는 은행들의 지적에 한 발 물러선 것이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최근 퇴직연금이 담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법규를 정비하겠다며 은행들에 퇴직연금 담보대출 상품 개발을 중단해달라고 통보했다.


퇴직연금 담보대출이 공론화 된 건 지난 6월 고용노동부와 금융위원회가 하반기 금융정책 과제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 개정을 내걸면서다. 코로나19로 경제적 곤궁에 처한 근로자에게 퇴직연금을 담보로 대출받을 길을 열어주겠다는 취지다. 이때 정부는 퇴직연금을 담보로 삼을 수만 있다면 경쟁력 있는 금리에 서민을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무주택자의 주택구입이나 전세금·보증금, 6개월 이상 요양, 파산선고·회생절차 개시, 기타 천재지변 등의 경우로 한정한 퇴직연금 담보대출의 문틈을 코로나19로까지 열어주는 구상이었다. 대출 상환을 위해 퇴직연금 중도인출도 가능하게 했다.

문제는 2014년 근로자 퇴직연금은 압류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은 대법원 판례에서 불거졌다. 은행들은 이 판례 때문에 질권 설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간주한 것이다. 근로자가 퇴직금을 중도인출할 수 있게 허용한다고는 했지만 근로자가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은행은 돈을 떼일 수밖에 없다.


은행들이 퇴직연금에 질권을 설정할 수 있는 법적 기반 없이는 상품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자 고용노동부는 결국 법 정비에 나서겠다며 후퇴했다. 애초 고용노동부, 금융위, 은행들은 11월부터 상품을 출시하기로 일정을 잡은 상태였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법원 판례를 우회하고자 퇴직연금 대출 범위를 넓히고 중도인출 등 수단을 강구했던 것으로 안다”며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은행 생리를 모르고 너무 쉽게 접근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이 퇴직연금 담보 가능 여부를 줄기차게 따진 건 질권 설정 없는 대출은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신용대출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은행들에 신용대출 관리를 주문한 금융위 취지가 무색해진다. 은행들은 여신 관리 문제와 함께 성격이 모호한 상품으로 우회적으로 신용대출을 늘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시중은행 중에서는 NH농협은행이 유일하게 이 상품을 취급하지만 담보 설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 관계자는 “퇴직연금 담보대출이 확대 실행돼도 대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며 “대출 용도를 엄격하게 제한하면 전체 가계대출에도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221조2000억원이다. 확정급여형이 138조원, 확정기여형·기업형퇴직연금(IRP)이 57조8000억원, 개인형IRP가 25조4000억원을 차지한다. 은행들이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절반 이상인 112조5000억원을 운용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