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7년, 용인 6년, 텍사스 3년…"뒷짐지고 호통치는 정부는 그만"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캠퍼스 2라인 전경

"일방 규제는 새 시대의 걸림돌입니다. 기업과 정부가 원팀을 이뤄야 합니다."

차기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재계에서 지난해 말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송년 인터뷰 발언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2년 이상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과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글로벌 공급망 차질에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유가급등, 물류난이 겹친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그만큼 새 정부에 대한 기업들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는 뜻이다.


최 회장의 발언 중 특히 '일방 규제'에 대한 지적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크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역대 정부와 정치권의 기업 정책이 일방주의에 치우쳤던 탓이 크다. 2020년 4월 회기를 시작한 21대 국회에서는 지난해 6월까지 1년여 동안 발의된 의원 규제 입법만 1만건이 넘었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던 경제관료의 말은 관가에서 여전히 관료의 자부심으로 통한다. 조선왕조 500년 이후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사농공상의 뿌리가 깊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정부는 다스리고 규제한다는 왕조 시대의 발상으로는 창의와 재기가 날뛰는 국제시장의 무대에서 제자리도 지키기 어렵다는 게 기업인들이 증언하는 현실이다. 국내에서 기득권의 이해와 이를 눈치보는 정부의 규제 일방주의가 득세하는 동안 해외에서는 구글, 아마존, 우버, 에어비앤비를 비롯한 빅테크 기업이 저만치 앞서나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미국 출장 후 귀국길에 취재진을 만나 "현장의 처절한 목소리들,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보고 오게 되니까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4대 그룹 한 임원은 "새 정부가 모든 규제를 금지된 조항만 아니면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 파생되는 신산업에 대해서는 네거티브 규제 도입을 서둘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동차업계 한 관계자는 "10년 뒤면 주력산업이 될 게 뻔히 보이는 자율주행차 분야만 해도 안전기준이 여전히 모호해 기술 개발에 어려움이 많다"며 "차기 정부는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여 달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전통의 효자 산업에서도 차기 정부에 '속도전'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크다. SK하이닉스 (183,800원 ▲3,900 +2.17%)가 2019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인가받은 지 3년이 지나도록 첫 삽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도, SK하이닉스도 애초 계획한 2025년 완공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시장에서는 이미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평택 7년, 용인 6년, 텍사스 3년"이라는 말도 나온다. 삼성전자 (78,400원 ▼800 -1.01%)가 지난해 11월 공식화한 미국 텍사스 현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완공 목표시점이 2024년으로 3년에 그친다는 걸 지적하는 얘기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이 계획 수립에서 가동되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가 사업계획을 공식화하자마자 텍사스 지방정부가 일사천리로 전력·용수 인프라 지원 계획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이들이 많다.

처벌을 강화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법 만능주의를 손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중대 재해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으로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나 유력 대선주자들이 찬성 의사를 밝혀온 노동이사제·집단소송제 도입, 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를 두고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 고용·사회정책본부장은 "기업이 자유롭게 경영에 나서도록 유도하려면 새 정부가 규제 리스크를 최소화하겠다는 강력한 정책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며 "중대재해처벌법 보완 입법이 첫 단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인을 압박하는 범규제로 법인세와 상속세를 꼽는 이들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듬해 법인세 최고세율을 25.0%로 올렸다. 지난해 기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21.8%)보다 3.2%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재계 한 인사는 "새 정부 출범 때마다 재계에서 비슷한 요청이 되풀이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며 "근본적으로 기업의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의 파트너로 보고 원팀 정신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재계 인사는 "뒷짐지고 호통치는 규제 일방으로는 정부도, 기업도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