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공" 외치며 50여년 손잡더니…통일교와 선긋기 나선 日자민당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의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가 합동결혼식이다. 통일교는 1960년대 초부터 국적·나이 등과 관계 없이 남녀 교인들을 부부로 합동결혼식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 의식을 거쳐야 원죄 없는 삶으로 거듭난다고 보고 있다. ⓒAFP=뉴스1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총격 사망 사건 이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이 일본 정치권을 뒤흔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특히 집권 여당인 자민당은 수십 년 간 통일교와 정치권이 유착했다는 언론 보도에 여론의 관심이 쏠리자 다급히 진화에 나서는 모습이다.

29일 블룸버그통신과 니혼게이자이·아사히·마이니치신문 등 외신을 종합하면 일본 정치권에선 유력 국회의원 상당수가 통일교와의 관계 해명에 진땀을 빼고 있다. "어머니의 고액기부로 평소 통일교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는 아베 총격 용의자의 진술 이후 일본 보수 정치인들과 통일교의 깊은 관계가 연일 공개되고 있어서다.


앞서 일본 현지 언론들은 통일교와 관계가 있는 총 112명의 국회의원들의 명단을 입수해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중의원 78명, 참의원 20명 등 자민당 소속 현역 의원 98명이 명단에 포함됐다. 야당인 입헌민주당 6명, 일본유신회 5명 등 의원들도 거론됐다. 이들 중에는 내각 관료나 당 간부 출신 유력 정치인도 34명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통일교 관련 행사에 참여하거나 축사를 보냈고 관련 단체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한 아베 전 총리의 친동생인 기시 노부오 방위상이 "통일교 관계자들과 오랜 기간 친분이 있으며 자원봉사자 모집 등에서 도움을 받았다"며 통일교에서 선거 지원을 받은 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도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후폭풍이 커지자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은 결국 지난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자민당과 통일교는 조직적 관계가 없는 것을 확실히 확인했다"며 "개별 국회의원들도 통일교와의 관계에 대해 엄정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주의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친동생인 기시 노부오 방위상 /ⓒAP=뉴시스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AP=뉴시스

정치·종교 달콤했던 만남이 부른 나비효과종교단체는 동맹으로 볼 수 없지만 적이 되면 곤란한 만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정치 공식마저 무너질 조짐이다. 히토쓰바시 대학의 나카키타 고지 교수는 "자민당 입장에선 압박이 클 것"이라며 "앞으로 정치권의 통일교 거리두기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반도 통일을 위한 집회에 참석한 통일교 신자들./ⓒAFP=뉴스1

일본 우익 정치세력과 통일교가 오래 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54년 한국에서 통일교를 세운 고 문선명 총재는 1968년 일본국제승공연합을 창설, 우익 정치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반 공산주의 사상을 기본으로 부부별성, 동성혼 등에 반대하는 통일교와 보수 성향 의원들의 주장이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다.

아베 전 총리의 외조부이자 자민당 내 극우파였던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가 1970년 일본 통일교회를 직접 방문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후 기시 전 총리는 반공입법 과정에서 재정 후원, 여론 형성 등을 위해 일본국제승공연합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아베 전 총리가 최근까지 통일교 행사에 영상을 보내는 등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 배경이 됐다.

일본 정치가에는 젊은 선거운동원 등 당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통일교가 조직적으로 후원금과 자원봉사자를 보내주는 것을 정치인들이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해 9월 통일교 관련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영상으로 연설하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더 엮였다간 큰 일" 거리두기 나선 집권 여당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살해 용의자인 야마가미 테쓰야가 10일 (현지시간) 나라의 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C) 로이터=뉴스1

자민당이 50여년간 이어진 통일교와의 관계 청산에 나선 것은 일본 보수정치의 상징인 아베 전 총리의 사망 이후 정치권과 종교계의 밀착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하고 있어서다. 특히 교인들이 낸 헌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었다는 의혹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는 분위기다.

외신들은 통일교의 헌납 방식이 '영감상법(영적인 문제를 이용한 상업행위)'으로 관련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 내에서 통일교 헌납 관련 소송을 벌이고 있는 전국영감상법대책변호사연락회(통일교피해대책변호사연합회)에 따르면 1987년 이후 통일교 관련 소송 민원이 3만5000건 이상으로 피해 주장 금액이 1240억엔(1조2000억원)에 달한다고 전했다.

이 변호사 모임의 회원인 와타나베 히로시는 "통일교가 일본 최고 정치인과 친분을 앞세워 영향력을 과시했으며 이는 신도들에게 헌납 등 동기를 부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통일교 측은 성명을 통해 일부 신도들의 과도한 헌납 등을 막기 위해 지난 2009년 준수 지침을 만들었으며 이후 관련 소송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일본 국민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 사망 소식을 다룬 신문 호외를 챙기고 있다. /ⓒAP=뉴시스

일본 야권에선 통일교 문제를 쟁점화해 자민당을 공격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지만 관련 이슈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집권당인 자민당보다 더 강한 우익 성향 단체가 많은 일본 정당들의 특성상 야당에도 통일교와 관계를 맺어온 소속 의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쿄 소피아대 국제정치학과 나카노 고이치 교수는 "아베 전 총리 사망 사건으로 통일교와 자민당 우파, 극우 정책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이뤄질 수 있다"고 봤다. 홋카이도대 종교학과 사쿠라이 요시히데 교수는 "통일교가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단지 사회적 반발과 비판으로부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으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지난 2020년 2월 경기 가평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 /ⓒAP=뉴시스

일본 통일교 신자들이 고 문선명 총재의 추도식을 하고 있다. /ⓒAFP=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