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장롱 속에 5천만원 보관하라' 보이스피싱 사기 막은 은행원

IBK기업은행 대전 대덕대로지점 이정화 대리(35)/사진제공=IBK기업은행

"예금 해지하고 5000만원을 전부 5만원 짜리로 뽑아줘요."

은행을 찾은 한 80대 할머니가 정기예금 중도해지를 요청하며 말했다. 창구에 앉은 할머니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자주 은행 출입문 쪽을 쳐다보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창구 직원이 중도해지 이유를 여러번 물었다. 하지만 이유를 물을 때마다 바뀌는 대답은 꼭 '거짓말' 같았다. 5000만원을 인출하기 직전, 직원은 할머니가 보이스피싱의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곧 경찰들이 출동했다.


보이스피싱범에 속아 거액의 돈을 인출하려던 할머니를 구해낸 은행원이 있다. IBK기업은행 대전 대덕대로 지점에서 개인고객을 담당하고 있는 이정화 대리(35)는 피해 예방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9월 대전둔산경찰서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이정화 대리는 "연세 많은 할머니가 거액의 돈을 모두 5만원짜리 현금으로 달라고 해서 여러번 돈의 사용처를 물었다"며 "처음에 할머니는 '아들이 장가가서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이사가는 집에 인테리어 비용이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기업은행 대덕대로 지점에선 어르신들이 1000만원 이상 큰 돈을 인출하는 경우 범죄 예방을 위해 사용처를 확인하고 있다.

행동은 더 수상했다. 할머니는 이 대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꾸 다른 소리를 늘어놓았다. 5000만원 인출 절차를 밟던 이 대리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곧바로 112에 신고했다. 경찰과 이 대리의 끈질긴 설득 끝에 할머니는 자신이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 대리는 "할머니가 완전히 세뇌된 상태라 처음엔 경찰 말도 믿지 않았다"며 "보이스피싱범이 할머니께 '은행원들이 돈의 사용처 등을 물을 것이니 이렇게 말하라', '통장 없이도 해지 가능하다' 등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검찰청을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은 할머니에게 "기업은행 계좌정보가 유출돼 카드가 발급이 됐으니 돈을 모두 찾아와 장롱 속에 넣어놓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말에 깜빡 속은 할머니는 살고 있는 아파트 동과 호수, 출입문 비밀번호까지 보이스피싱범에게 모두 알려주고 은행으로 달려온 것이다.

피해 사례가 많다보니 보이스피싱 피해 방지로 표창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 날은 좀 달랐다. 같은 날 대전 지역 타행에서는 동일범에 의한 동일 수법의 보이스피싱 피해가 두 건이나 일어난 것. 피해액은 각각 5000만원과 3500만원. 대전둔산경찰서는 이 점을 고려해 이 대리에 대한 표창 수여를 결정했다. 이 대리는 보이스피싱에 대응한 사내 우수 사례로 꼽혔다.

이 대리는 "보이스피싱 수법이 진화되며 계좌이체 등 이전 수법은 이제 쓰지 않는다"며 "어르신들에게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냉장고나 장롱 속에 넣어놓으라고 한 다음 가져가곤 한다"고 말했다.

기업은행 대덕대로 지점은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해 매주 월요일 회의 때마다 전 직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경찰과 연계한 보이스피싱 피해 방지 노력도 하고 있다. 이 대리는 "경찰에서 어르신들이 1000만원 이상 현금인출을 요청할 경우 신고 먼저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며 "경찰에서 회신이 올 때마다 전 직원에게 내용을 공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수법이 다양화돼가는 만큼 고객들의 주의도 요구되지만 직접 현금 출금을 해주는 행원들의 교육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고객들의 소중한 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