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전 피난민 보금자리 해방촌, 지금은 '임대료 해방구'

지난달 29일 낮, 서울 용산구 한남동 용산2가동 해방촌 거리에 노후주택을 개조해 들어선 상가들의 모습. /사진=신희은 기자.

30도를 웃도는 폭염이 아스팔트를 달구는 지난달 29일 낮. 서울 용산구 국군재정관리단(옛 중앙경리단) 앞 도로변은 20~30대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한낮의 더위를 잊기 위해 길가 테라스에서 생맥주를 들이켜는가 하면, 경리단길과 건너편 해방촌을 오가며 개성 있는 상점들을 카메라에 담기 바쁜 이들로 일대가 북새통을 이뤘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좁은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외국인들과 20대 연인들은 골목 곳곳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둑해질수록 일대 거리는 한국이면서도 한국 같지 않은,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뽐낸다.

◇입소문 타고 모여든 외국인·젊은이들로 한낮에도 '북적'

해방촌 일대 유명 레스토랑·식당 앞에는 한낮에도 20~30대 젊은이들이 줄을 길게 늘어선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진=신희은 기자.

도로변은 물론 골목까지 상권이 확대돼 온갖 나라 음식들을 접할 수 있는 경리단길에서 육교 건너 한신아파트 뒷길 남산 방향으로 용산2가동 해방촌이 나온다.


경리단길보다는 훨씬 조용한 편이지만 최근 오래된 단독주택들을 개조한 레스토랑, 카페, 공방, 펍 등이 줄줄이 들어서면서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독특한 소스와 패티를 자랑하는 한 수제버거집 앞에는 한낮 땡볕에도 20명에 가까운 손님들이 줄을 섰다. 길가 부동산 중개업소 유리문에 '상가로 개조 가능한 단독주택' 시세를 써붙인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방촌은 낙후된 단독주택 밀집지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의 이태원과 비교하면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상점을 열기 위해 내부 수리가 한창인 해방촌 길가의 한 주택의 모습. /사진=신희은 기자.

하지만 경리단길 대로변에 들어선 몇몇 개성 있는 상점들이 입소문을 타고 손님을 끌어모으고 경리단길이 이태원 못지 않은 상권으로 급부상하면서 해방촌으로까지 상권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해방촌 길가 단독주택 시세는 3.3㎡당 3000만원에 육박한다. 골목에 자리 잡은 구옥도 3.3㎡당 2000만원을 넘는 수준이다.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상점이 속속 들어서면서 전월세 가격도 급등세다. 원룸~투룸 월세가 보증금 1000만원 기준 80만~100만원에 달한다.

해방촌의 L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거주나 투자 목적으로 구옥을 매입하고 싶다는 문의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관심이 높은 지역"이라며 "하루하루 달라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이기 때문에 괜찮은 매물은 내놓기 무섭게 거래된다"고 귀띔했다.

활기차고 이국적인 저녁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옥탑방은 이례적으로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통상 월세가 30~50만원으로 시세 대비 저렴하게 형성돼 있는 옥탑방도 이곳에선 두 배 가까운 임대수익을 올릴 정도로 인기다.

해방촌 단독주택 원룸에 월세 60만원을 내고 살던 20대 나모씨는 "집주인이 좁은 방에 터무니없이 월세를 올려달라고 해 싸우고 이사를 결심했다"며 "밤늦게까지 환하고 분위기도 밝아 살기 좋았는데 이렇게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실향민 정착촌에서 예술마을·뜨는 동네로…"마을기록단도"

전체 10채 중 7채가 20년 이상 된 노후주택들로 이뤄진 7년전 2009년의 해방촌 풍경. /사진=머니투데이 DB.

이제 막 부상하기 시작한 해방촌은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들이 정착해 살았던 유서 싶은 동네다. 1945년 광복 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 전쟁 피난민들은 지금으로 치면 용산구 용산2가와 용산1가, 즉 남산타워 남쪽 언덕에 모여 살았다.

해밀튼호텔을 중심으로 한 이태원이 미군부대의 영향으로 '이방인들의 성지'로 떠오른 것처럼 해방촌도 어찌보면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과 피난민들의 보금자리라는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후 2012년 용산구에서 해방촌에 벽화사업을 진행하면서 '예술마을'이라는 칭호도 얻게 됐다. 해방촌에 정착한 예술가들이 모여 축제를 열고 공방과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단순히 상업적으로 부상하는 공간이 아닌 예술적인 면모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시는 올 들어 해방촌의 빈집 39채를 문화예술인을 위한 창작공간으로 조성하는 '문화예술마을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들 주택은 외지인이 투자 목적으로 구입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공실 상태로 남아 있는 곳들이다. 시는 사업에 참여해 빈집을 문화예술인에 임대하는 집주인에게 집수리비와 신축비용을 무이자로 융자해준다는 방침이다.

해방촌 마을기획단 등은 주민제안사업의 일환으로 동네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다. /사진=신희은 기자.

옛 역사와 기억을 잊지 말고 보전하기 위한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골목이 활성화되는 것은 좋지만 해방촌의 본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해방촌 도시재생사업지원센터와 마을기록단은 오는 10일까지 해방촌 관련 사진·영상·물품 등을 수집·분류하고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는 사업에 참여할 시민들을 모집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살기 좋은 마을로"

해방촌 풍경은 앞으로도 계속 달라질 전망이다. 20년 이상 된 노후주택이 10채 중 7채에 달하던 동네 외관이 상권 확대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이태원에서 꼼데가르송길, 경리단길, 해방촌을 잇는 상권이 서로 시너지를 이루면서 인근 주거환경과 주택 시세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모두 걸어서 접근이 가능한 인접 지역이라는 게 큰 장점이다.

상권 부상에 따른 부작용은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이태원과 경리단길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해방촌에 문을 연 상점들은 임대료 상승이 고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주택과 혼재된 골목 상권의 소음으로 인한 주거환경 악화도 문제다.

서울시와 용산구도 마을 특성을 살린 주거환경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시는 서울형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 중인 해방촌에 최대 10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기로 하고 주민협의체를 중심으로 4~5년에 걸쳐 다양한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은 △신흥시장 활성화 △공방·니트산업 특성화 지원 △해방촌 테마가로조성 △안전한 생활환경 조성 △녹색마을 만들기 지원 △주민역량강화 지원 △마을공동체 규약 마련 △주민공동이용시설 조성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