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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년 전 오늘…'백정' 출신 조선 1호 양의(洋醫) 고국서 잠들다

백정 출신 국내 1호 서양 의사 박서양, 독립운동·교육자로도 평가받아

머니투데이 이미영 기자 |입력 : 2016.12.1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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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양 선생. /사진=나무위키
박서양 선생. /사진=나무위키
76년 전 오늘…'백정' 출신 조선 1호 양의(洋醫) 고국서 잠들다
태어날 때 그는 이름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도 이름이 없었다. 그저 '박씨'로 불렸을 뿐이다. 그의 가족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기와 한장 얹을 수 없었던 비루한 곳에서 함께 모여 살았다. 희망없는 미래에 하루살이처럼 버티며 살아야 했다.

그는 백정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천민이었다. 그 어떤 신분상승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의학교육을 받았고 국내 1호 서양 의사가 됐다. 의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독립군을 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학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10살이 되던 해, 박서양에겐 운명같은 일이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가 콜레라에 걸렸는데 에비슨 선교사가 그를 신분의 귀천과 상관없이 극진히 보살펴 살려낸 것이다. 박서양은 그때 자신도 의사가 되길 결심한다. 하지만 그에겐 의학을 배울 수 있는 길도, 배울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무턱대고 한 선교사를 찾아가 아들에게 의학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한다.

1년 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1896년 2월 백정들에게 면천이 허용된 것이다. 이는 에비슨 선교사의 노력 덕이었다. 1895년 콜레라가 조선 전역에 퍼졌다. 이때 에비슨 선교사가 방역 담당을 맡았던 에비슨의 공로로 큰 화를 면하게 된 것이다. 조선 정부의 큰 신임을 얻은 에비스는 백정의 면천을 간곡하게 요청, 관철시켰다. 그는 '서양'이라는 이름을 그때 얻었고 공부할 수 있는 '사회적' 자격도 얻었다.

외과수술을 보조하는 박서양. /사진=위키피디아
외과수술을 보조하는 박서양. /사진=위키피디아

그렇다고 바로 의학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그를 제중원의학교에 정식 입학시키지 않고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직원으로 대했다. 박서양은 묵묵히 그 일을 해냈다. 알고보니 에비슨 선교사가 박서양의 끈기를 시험해본 것이다. 에비슨은 그의 노력을 인정했고 제중원의학교에 입학해 1908년 국내 1호 양학 의사로 성장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그를 백정 출신이라며 종종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내가 배운 과학의 피를 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의사로서, 선생님으로서 삶에 만족하지 않았다. 1917년 한일병합이 된 후 그는 독립군들이 활동하는 간도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많은 독립군들은 그의 손 덕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그는 9년 후인 1936년 돌연 귀국을 결정했다. 만주사변 이후 독립운동이 크게 위축되고 그의 학교가 폐교되면서 간도에서 그의 역할도 점점 축소된 것이다. 50대에 접어든 그는 고국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었으리라 추측된다.

국내에 들어온 박서양은 1940년 12월15일 광복을 5년 앞두고 사망했다. 박서양의 의사로서의 열정, 나라에 대한 애국심은 서서히 잊혀가다 2006년 박형우 연세대 교수가 66년이 지난 2006년 그의 삶을 다시 세상 속으로 불러냈다. 2008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10년에는 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이미영
이미영 mylee@mt.co.kr

겉과 속이 다름을 밝히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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