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90인데요"…위안부로 짓밟힌 가수의 꿈 이루다

길원옥 할머니가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열린 '길원옥의 평화' 음반 제작발표회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길원옥 할머니의 음반은 세계위안부 기림일인 14일에 발표된다. /사진=뉴스1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아~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역대 최고령 신인 가수의 음반 발매 기념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가수는 다름 아닌 일본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명인 길원옥(89) 할머니다.


길 할머니는 "할 말 없어요, 별반 노래 잘 허지 못해요"라고 소감을 대신하면서도 "(사람들이) '가수' 길원옥이라 그러니까.. 어디 한 마디 해볼까요"라며 가수 손인호의 '한 많은 대동강'을 열창했다. 대동강을 그리는 가사에서 열 세살 때 집을 나와 아직까지도 집에 돌아가지 못 하는 애달픔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쑥스러운 듯 말을 아꼈다.

오는 14일 발표되는 '길원옥의 평화' 앨범에는 할머니가 평소 즐겨 부르던 '한 많은 대동강', '아리랑', '뱃노래', '바위처럼' 등 15곡이 담겼다. 장상욱 휴매니지먼트 대표, 류민석 음악감독, 코러스로 참여한 20대 학생들 등 많은 이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내가 좋아하니까, 고저 심심하면 남이 듣기 싫어하건 말건 노래하는 게 직업이야요. (앨범 녹음도) 그냥 허다보니까 했어."


길 할머니는 평양북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당시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가 장물을 구입해 감옥에 갔다. 할머니는 보석금 10원을 벌기 위해 학교를 그만뒀다.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중국 동북지역 위안소로 끌려갔다. 그 때가 열 세살이었다. 초경조차 시작하지 않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던 어린 소녀는 일본군의 강간과 폭행을 견뎌야 했다.

'해방' 이후에도 '노래'를 되찾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위안부'를 둘러싼 편견 때문이었다. 이날 참석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공동대표는 "(과거에는) 아픈 과거를 가진 개인이 노래를 잘하고 춤 잘 추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보는 시선이 있었다"며 "(할머니는) 야유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서 수근덕거리는 느낌을 받았다며 이후로 야유회도 못 갔다"고 말했다.

길 할머니는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된 건 3년 전. 미국에 캠페인을 갔는데, 기자회견장에서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아픈 과거를 묻지 않았다. 대신 윤 대표가 "할머니가 노래를 잘 하신다"고 하자 "그러면 노래 한 곡 해달라"고 한 게 전부였다. 미국 방송에서는 할머니의 노래를 녹음해 보도했다. 대표는 "이젠 한국에서도 당신의 과거를 묻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윤 대표는 "우리는 그동안 이 여성을 '위안부 길원옥'으로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했던 것 아닐까"라며 "할머니를 '사람' 김원옥으로 만들어드릴 때 진정한 해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길 할머니는 '가수'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행복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제 목소리 제가 듣는데 뭐 별다른 생각나겄어요? 그저 '나잇값 좀 했음 좋겄다' 하지. 세상에 노래 잘 하는 젊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데. 90살 먹은 늙은이가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한다고 생각하면요, 어떨 때는 나이 먹어서 주책 떠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길 할머니는 오는 14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문화제 '나비, 평화를 노래하다'에서 데뷔 무대를 갖는다. 앨범은 저작권 문제로 정식 판매되는 대신 정의기억재단 '20만 동행인' 캠페인에 참여한 10만원 이상 기부자에게 증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