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시계 살려낸 '구원자' 비버 "중요한 건 타이밍"

장 클로드 비버 태그호이어 CEO(최고경영자). /사진=태그호이어 웹사이트

1980년대 초 스위스 시계업계는 '존재의 위기'를 맞는다. 수백 년 이어온 기계식 시계 전통에 일본산 쿼츠시계가 도전장을 내밀면서다. 쿼츠시계, 즉 전자시계는 스위스 장인들이 만든 기계식 시계보다 더 저렴하고 정확했다. 선풍적인 인기 속에 판매가 급증했다. '블랑팡' 같은 스위스 전통 브랜드가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하이에크 스와치그룹 설립자는 정면 대응에 나섰다. 1983년 스와치를 설립해 색색의 50달러짜리 플라스틱 쿼츠시계를 선보였다.


장 클로드 비버 태그호이어 CEO(최고경영자)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1983년 블랑팡 브랜드를 공동 인수한 그는 도발적인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메시지는 단호했다. '1735년 설립 이후 블랑팡 쿼츠시계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스위스 명품시계 브랜드들조차 쿼츠시계 비중을 70%로 높인 1980년대에 블랑팡은 스위스 시계 전통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되살아났다. 스와치그룹은 10년 뒤 6000만스위스프랑(현재 환율로 약 692억원)에 블랑팡을 인수했다. 비버가 공동 인수한 가격의 2700배가 넘는다.

＃스위스 시계산업 '구원자'… 블랑팡·오메가·위블로 회생 주도
올해 68살인 비버는 스위스 시계산업에서 '구원자'로 통한다. 그가 새 생명을 불어넣은 브랜드가 한둘이 아니어서다. 고비마다 구원투수로 나선 그는 대담하고 반직관적인 대응으로 위기를 돌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블랑팡을 매각한 비버는 1993년 스와치그룹 이사회에 합류해 '오메가' 브랜드 회생 임무를 맡는다. 오메가는 1960년대만 해도 '롤렉스'와 어깨를 겨뤘지만 당시는 기세가 많이 기운 뒤였다. 비버는 한 인터뷰에서 오메가가 자동차업체들처럼 매년 다른 스타일의 새 모델을 선보인 게 패착이었다고 꼬집었다. 브랜드 위상이 낮아진 가운데 맞은 쿼츠시계의 도전은 직격탄이 됐다.

비버는 마케팅을 강화하는 데 공을 들였다. 오메가가 영화 '007 시리즈'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시계로 부상하면서 매출이 10년 만에 3배 늘었다. 당시 그는 영화 제작사가 제시한 가격을 깎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금액을 제시하며 영화 내에서 오메가의 역할을 키웠다고 한다.

2004년 이사회 일원이자 CEO(최고경영자)로 '위블로'에 합류한 비버는 '퓨전'(fusion·융합)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다. 특히 전통과 미래의 융합을 강조했다. 동시에 공급을 제한해 몸값을 높였다. 이 결과 2004~2007년 매출이 5배 늘었다. 2008년에는 프랑스 명품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위블로를 인수했다.

비버의 공급 제한 전략은 위블로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버티는 힘이 됐다. 공급량이 달려 소매업체들이 경기침체기에도 주문을 줄이거나 가격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버는 2009년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사람들은 특권을 원한다"며 "고객을 항상 허기지고 욕구불만인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쿼츠시계엔 전통, 스마트워치엔 변화…'비전+타이밍' 승부수
위블로와 함께 LVMH의 일원이 된 비버는 2014년 '태그호이어' CEO를 맡아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2015년 첫선을 보인 애플워치의 공세와 중국의 반부패 단속, 유럽 테러라는 '삼중고'가 들이닥쳤다. 애플워치는 쿼츠시계에 버금가는 위협이 됐고 중국의 반부패 사정과 유럽에서 잇따른 테러는 각각 홍콩과 프랑스의 매출을 급감시켰다. 스위스 시계 수출액은 2014년 220억스위스프랑에서 2016년 194억스위스프랑으로 12% 가까이 줄었다.

비버는 가장 큰 위협인 애플워치를 쿼츠시계와 같은 기회로 봤다. 다만 기회를 활용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스위스 시계업계가 스마트워치를 경계하던 2015년 태그호이어는 구글, 인텔과 손잡고 개발한 스마트워치 '커넥티드'를 선보였다.

비버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 회견에서 "애플워치에 1000달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태그호이어 시계에도 1000달러를 쓸 수 있지만, 그가 스마트워치를 원하고 태그호이어에 스마트워치가 없다면 결국 애플워치를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의 구조적 위기는 쿼츠시계가 우리 제품을 구식으로 만들었을 뿐이지만 이제 겪게 된 두 번째 위기는 우리 제품을 구식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고객들이 우리 제품을 사지 않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비버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온라인 광고에도 열을 올렸다. 미래의 고객인 10대들의 관심을 사려는 것이다. FT는 태그호이어의 매출을 따로 볼 수는 없지만 LVMH의 시계·보석 부문 매출이 2015년 33억달러에서 지난해 38억달러로 늘었다며 어려운 시기에 선방했다고 평가했다.

비버는 FT 회견에서 자신의 '리더십 영웅'으로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를 꼽았다. 잡스가 남다른 비전으로 이룬 아이폰 혁명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비버도 비전을 강조했다. 다만 그는 시계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답게 '타이밍'을 강조했다. 비버는 "타이밍이 없는 비전은 의미가 없다"며 "너무 이르거나 늦으면 시장은 준비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