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도 미투가…말못할 '男男 女女' 성폭력

임종철 디자인기자

직장인 이모씨(32)는 아직도 10여년 전 기억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다. 2006년 신병 시절 군대에서 같은 남성인 상급자에게 성추행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이씨는 취침시간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몸을 더듬는 선임 병장의 손길을 느꼈다. 깜짝 놀란 이씨는 그대로 몸이 굳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씨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음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선임을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이씨는 동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생각에 치욕스러워 어디 가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거세게 일고 있는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보며 자신이 겪은 일도 해당하는 것 같아 생각이 많아졌다.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저지르는 동성 간 추행·희롱도 반드시 근절해야 할 성폭력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남녀간 성폭력에 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엄연한 성폭력이라는 지적이다.

동성 간 성폭력은 피해자들이 수치심에 신고를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동성 간 성희롱 진정 건수는 남-남 58건, 여-여 45건에 그쳤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예전에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동성애로 오해를 받을까 봐 피해 상담 자체가 많지 않았다"며 "요즘 조금씩 상담이 늘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남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성희롱이나 성폭력은 군대, 감옥 등 사회와 격리된 공간에서 발생하기 쉽다. 상급자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는 과정에서 후임자를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식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군대 내 동성 간 성추행은 드러난 건만 2013년 2건에서 지난해 상반기 21건으로 증가했다.

여성 간에는 언어 성희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편이다. 경기도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강모씨(29)는 40대 여성 상사로부터 "실실 웃고 다니는 게 남자한테 잘 줄 것 같다", "가슴도 작은 게 브래지어는 왜 차고 다니냐"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직장인 민모씨(29)도 40대 여성 상사가 공개적으로 "엉덩이에 살이 너무 많다", "다른 부위는 날씬한데 엉덩이가 너무 크다"는 식으로 신체 특정 부위를 평가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

전문가들은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동성 간 일어나는 성폭력도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동성 간 성폭력도 더 강한 위력이 작용할 때 생기는 만큼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의 취지에 맞다"며 "이성에게 당한 성폭력과 똑같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동성 간에는 가해자가 장난삼아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친밀감이나 일상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며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피해자가 느낀 수치심 등을 기준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