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약관 통과시켜 놓고 "책임은 보험사가 다 져라"

지난해 보험업계를 뒤흔들었던 수천억원대 자살보험금 미지급 논란이 일단락 된 지 1년 남짓 만에 1조원대에 육박하는 즉시연금 과소지급 사태가 터졌다. 업계에서는 “다음엔 뭐가 터질지 두렵다”는 반응이다. 제2, 제3의 분쟁을 막기 위해 금융상품 약관에 대한 승인과 감독 권한을 가진 금융당국이 책임 있는 자세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즉시연금은 목돈을 한 번에 보험료로 내면 보험사가 이를 받아 운용해 이익금을 매달 생활연금으로 지급하고 가입자가 사망하거나 만기가 돌아오면 보험료 원금은 돌려주는 상품이다.


자살보험금 처럼 약관이 발목을 잡았다. 즉시연금은 보험 만기 시 만기보험금을 지급하는 상품과 그렇지 않은 상품으로 나뉜다. 이중 만기환급형 상품은 가입자가 낸 보험료의 일부를 만기보험금 지급을 위한 재원으로 공제한 후 매월 연금으로 지급한다. 하지만 일부 보험사가 판매한 만기환급형 즉시연금 약관에 ‘연금지급시 만기보험금 지급재원을 공제한다’는 내용이 빠져 있었다.

업계에서는 약관에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산출방법서’에 따라 계산해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에 잘못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는 “보험사의 주장을 수용하면 난해한 산출방법서가 보험약관의 은신처로 기능하게 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된다”며 약관에 명시하지 않은 보험사의 잘못을 인정했다.

보험업계에선 통상 보험상품을 출시할 때 기초서류라고 불리는 약관, 산출방법서, 사업방법서 등에 관해 금융당국의 승인을 얻은 만큼 당국에 대한 불만을 내놓고 있다. 특히 즉시연금의 경우 목돈을 가진 고객이 대상인 방카슈랑스(은행에서 파는 보험상품) 상품으로 출시돼 사후 보고하는 기존 보험상품과 달리 금감원의 사전 신고 후 판매됐다. 문제가 된 약관에 대해 당국이 미리 살펴보고 승인을 해줬다는 의미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규제산업인 금융업에서 약관에 문제가 없다고 팔라고 승인해 준 상품을 뒤늦게 문제가 있으니 돈을 다 돌려주라고 하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느냐”며 “그때그때 담당자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정책의 일관성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분조위는 “감독당국으로 인가를 받거나 신고 또는 제출 등의 절차를 거쳤다고 해서 보험약관이 적정하게 작성됐다는 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당국이 왜 미리 약관의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느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금감원과 금융회사간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와 금융회사간의 분쟁이다”고 말했다.

최악의 분쟁으로 꼽히는 자살보험금 사태 이후에도 당국이 과거 만들어진 모호한 약관을 그대로 방치해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불과 수년전만 해도 금융사들이 금감원이 만든 표준약관을 그대로 준용하거나 한 금융사가 승인받은 약관을 그대로 베껴 상품을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당국도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해 왔으나 잠재된 문제 요인을 해결하지 않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금융사의 부담으로만 돌린다는 것이다.

보험업계 다른 관계자는 “자살보험금 사태 이후에도 알아서 문제 되는 약관을 찾아서 바꾸라는 것 외에 당국 차원의 가이드라인이나 잘못된 약관에 대한 구제방안이 전혀 없었다”며 “금융사 입장에서는 약관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아챘더라도 밝히는 순간 수백억~수천억원이 날아갈 수 있는데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기분으로 쉬쉬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